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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신이 된 남녀 2명의 무용수들이 줄에 매달리고, 다른 무용수를 무등 태워 올리는 등 구원의 갈망을 표현한다. 사진은 리허설 장면이나 공연에서 이들 네 명은 나신으로 연기한다.
나신이 된 남녀 2명의 무용수들이 줄에 매달리고, 다른 무용수를 무등 태워 올리는 등 구원의 갈망을 표현한다. 사진은 리허설 장면이나 공연에서 이들 네 명은 나신으로 연기한다. ⓒ 시댄스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는 너무도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장과 벽에 그려진 그의 그림은 물론 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천지창조, 원죄 그리고 최후의 심판까지 담아내고 있으니 인류의 처음과 끝이 그곳에 모두 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많은 후대 화가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성서에서 꾸짖는 원죄의 내용은 기독교인에게만 유효할 것이나 그의 그림은 성서를 떠나 인간이 갖은 원초적, 본질적 고통에 대한 상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세세토록 명작으로 추앙받는 그의 작품들이지만, 그것을 그릴 당시 미켈란젤로는 만족도 있었겠지만 당시 형편에 대한 불만과 고통이 컸었다.

성 베드로 성당 천장벽화를 그리면서 친구인 지오바니에게 “내가 과연 진정 화가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온종일 구부리고 일하느라… 중략 …내 배는 내 턱에 짓눌려 있고, 턱수염은 하늘을 향해 있고, 내 뒷목은 등에 닿아 있으며 가슴은 새처럼 휘어 있다네. 그리고 온종일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 덕분에 얼굴은 엉망진창이지”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의 원죄 부분도.
미켈란젤로의 원죄 부분도. ⓒ 미켈란젤로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시댄스에 참가한 낭뜨 국립 끌로드 브뤼마숑 무용단의 <심연의 우수>는 그림과 동시에 그것을 그린 미켈란젤로까지 동시에 표현했다. '원죄' 등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는 섬뜩할 내용을 담고 있다. 1시간 10분 남짓한 브뤼마숑 무용단의 <심연의 우수>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충격적이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무대에 오버랩 시키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심연의 우수>는 여덟(여4, 남4) 명의 무용수와 다시 여덟(여1,남7)의 보컬 앙상블이 무대에서 함께 만드는 작품이다. 보컬 앙상블은 고음악을 전문으로 노래하는 '아 세이 보치(A Sei Voci)'로 르네상스 시대 작곡가 조스껭 프레의 미사곡을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불렀다. 그에 반해 무용수들은 등장부터 반라로 시작해서 저러다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격렬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보컬도 앉아서만 있을 수가 없었는지 자주 무용수들의 동선 사이로 끼어들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무용수와 보컬이 일대일로 마주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궁중무용인 봉래의에서도 악사가 춤을 춘 기록이 있으니 합창단이 춤까지는 아니어도 조촐한 동선을 갖는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다.

설혹 그런 예가 없다고 해도 컴템포러리의 영역 속에서 A가 A의 역할과 기능에 억압당하는 일은 없으니 무용수가 노래하거나, 합창단이 춤을 춘다고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 세이 보치 단원들이 뒤편에서 라이브로 미사곡을 부르고, 무용수들은 계속해서 뿌려지는 진흙에 온몸을 내던져 연기하는 장면. 사진은 리허설 컷.
아 세이 보치 단원들이 뒤편에서 라이브로 미사곡을 부르고, 무용수들은 계속해서 뿌려지는 진흙에 온몸을 내던져 연기하는 장면. 사진은 리허설 컷. ⓒ 시댄스

이질적인 두 장르가 한 무대에서 철저하게 다른 방법과 온도로 겹치는데 그것이 순방향의 결합보다 훨씬 더 근사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아니 '아 세이 보치'의 청아한 미사곡 연주가 없었다면 무용수들의 격렬하고, 관능적인 동작들에 대한 오해를 강제 당할지도 모를 거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심연의 우수>에서 음악은 주제를 보조하고, 세트나 소품 그리고 조명보다 훨씬 더 큰 배경이 되었다.

객석불이 꺼지면서 무용수들이 무대로 등장해 자리를 잡고, 보컬도 무대 뒤쪽에 둥그런 모여 노래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반라의 남녀가 진흙과 물에 뒤범벅되는 온갖 가학과 자학의 동작을 숨쉴 틈 없이 쏟아낸다.

공연시간 1시간 10분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미리 반라, 전라의 정보를 알고 갔다고 해도 그들의 동작이 시작되자마자 관음적 동기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낭뜨 국립 끌로드 브뤼마숑 무용단의 <심연의 우수> 도입부 장면. 오른쪽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부분도인 악령이 영혼들을 배에 싣는 모습과 어쩐지 닮아 보인다.
낭뜨 국립 끌로드 브뤼마숑 무용단의 <심연의 우수> 도입부 장면. 오른쪽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부분도인 악령이 영혼들을 배에 싣는 모습과 어쩐지 닮아 보인다. ⓒ 김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심연의 우수>에는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이 움직였다. 그림과 화가를 동시에 뒤섞었을 거라 말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무용수들은 나신으로 뒤엉켜 흐느적거리다가 발작하듯 뛰어오르는 등 본능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파격적 동작들을 이어갔다.

태어난 곳으로 막연히 귀환하는 연어의 힘찬 역류가 삶보다는 자기 죽음을 향한 몸부림인 것처럼,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동작들은 절망과 염원이 뒤엉킨 이미지를 자아냈다.

보통의 현대무용이 흔히 그렇듯이 <심연의 우수>의 많은 동작들도 춤이라는 고전적 의미로 찝어낼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여자무용수가 거구의 남자 무용수들어 올려 감당하는 등 마치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동작들은 오랜 훈련과 호흡을 함께 감당하지 않고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고난도의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의미하는 것, 혹은 의도하는 것을 넘어선 춤의 느낌, 영감에 천착하는 모습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안무자 끌로드 브뤼마숑도 역시 의도나 의미를 묻는 관객에게 "춤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없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그 표현에 대한 판단은 관객 나름대로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심연의 우수> 거의 마지막 부분 리허설 장면. 실제 공연에서 이 남자무용수는 나체상태로 연기한다.
<심연의 우수> 거의 마지막 부분 리허설 장면. 실제 공연에서 이 남자무용수는 나체상태로 연기한다. ⓒ 시댄스

<심연의 우수>는 프랑스 작품답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프랑스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일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자유에는 피 냄새가 배어 있다고 했다. 프랑스의 자유에는 대혁명의 피가 배어있으니 그들은 자유의 권리 있다. 또한 그들의 자유는 자유로 인해 광기와 닮은 절망을 알고, 그것이 종교적이건 아니건 원죄적 천형에 대한 몸부림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미지의 진행이 가슴을 격하게 압박하고, 거기에 무반주 미사곡이 얹혀진 <심연의 우수>는 결국 원죄에 대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브뤼마숑 방식의 미켈란젤로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자신들이 천착하는 주제에 대한 중의적 표현이었을 것이라 정리해본다.

빠르고 격렬한 동작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람을 마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조금 전의 동작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정지하는 느낌을 받게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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