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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숲
카시페로, 우정과 사랑 그리고 모험!

<오! 행복한 카시페로>는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그라시엘라 몬테스가 지은 아동 문학이다. 문학교사로 일하면서 동화 작가, 소설가, 번역가, 편집가로 활동한 그라시엘라 몬테스는 안데르센 상 후보에 세 차례 오른 바 있다.

<오! 행복한 카시페로>는 아르헨티나 아동문학상 판타지 부문 우수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받았고, 뮌헨 국제 청소년 도서관 추천도서, 콜롬비아 독서협회 추천도서, 베네수엘라 도서은행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국내에는 <토마스는 누굴 닮았을까요?>가 2002년에 소개되었다.

<오! 행복한 카시페로>의 주인공 카시페로의 원래 이름은 '귀돌이'다. 젖이 열 개뿐인 어미개의 열한 번째 강아지로 태어났다. 힘이 센 누나와 형들에게 밀려 늘 배가 고팠다. 어미 개는 숫자를 셀 줄 모르는 듯 귀돌이를 자꾸 젖꼭지 없는 품 밑으로 밀어넣었다. 어미 개는 마을의 떠돌이 개로 가끔 농장에서 먹을거리를 얻어왔지만 풍족하지는 않았다. 길거리의 개인 형제자매들은 차츰 자라서 생존 방식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농장 음식 훔쳐먹기, 쓰레기통 뒤지기 같은 거였다.

더 자라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구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농장을 지키는 경비견 되기, 애완견 되기, 서커스단에서 묘기 하기, 장난감 인형 모델 되기, 화학 약품 실험 대상 되기 등이다. 먹고살기 위해 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다. 그리고 모두 사람의 편의에 따라 부려지는 일자리라 개의 진정한 욕구 같은 건 그다지 보장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마저도 그때그때 사람의 취향에 따라 바뀌는 마당에 개의 실체가 뭐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개에게 진정한 욕구라고 하면 뭐 사람의 기본적 욕구와 많이 다르지 않다. 먹고 자고 사랑하기. 그런데 가난하고 못생긴 개에게는 이 간단한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인조꼬리와 귀싸개를 달고 애완견 행세를 하다가 결국 자유를 찾아 도망친 귀돌이는 이후의 일자리에서도 끊임없이 난관에 부딪힌다. 자신을 존중해주고 수프를 나눠주는 가난한 사람을 만나기까지 행복을 찾아 떠나는 귀돌이의 여행에는 두 번의 로맨스와 갈비씨라는 뼈다귀로 곡을 연주하는 친구와의 우정이 곁들여진다. 개의 모험담으로 손색없이 삼박자가 맞는다.

개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개는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다. 사람에게 길들어 집을 지키고, 애완용이 되어 친구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식용이 되기도 한다. 개가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기 시작한 이래 개의 운명은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어쩌면 개들은 대부분 별생각 없이 사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삶이 그러했으니 평생 그러려나 보다 하고 하루하루 주인을 그리워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지도 모른다. 개를 기르는 사람들도 별반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예뻐해 주면 됐지 뭐 다른 게 필요하겠느냐는 정도에서 생각의 진행을 멈춘다.

대다수의 삐딱한 문제의식이 생겨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개로서의 운명에 대한 자각도 배고픈 개에게서 싹튼다. 본의 아니게 운명에 의해 길거리로 떠밀려진 개의 절망적인 체험에서 전체 개들의 운명을 조망할 문제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전 세계의 개들이 비슷한 운명인 모양으로 아르헨티나의 카시페로도 우리네 개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개의 일생을 험난하게 살아나간다. 평화적인 듯 보이는 개와 인간의 공존은 그 실체를 놓고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이를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그 불행한 운명의 실태에 놀랄 수밖에 없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와 고양이 등의 유기동물은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인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면 절반 이상은 안락사의 길을 걷게 된다.

농림부 자료에 따르면 2004년 국내에서 포획, 구조된 유기동물 4만5003마리 가운데 주인에 인도된 경우는 1918마리(4%), 안락사한 경우는 2만 3562마리(53%)에 달했다. 나머지는 다른 가정에 입양되거나 연구기관 등에 기증된 것으로 나타났다.

어느 가정집에서 애완용으로 태어나 미용실과 산책 이외에는 밖에 나가본 적 없는 귀한 집 개라 해도 마냥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부러워할 수만은 없다. 우연히 편안한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보장받는다고 해도 그의 운명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달렸다는 것은 자명하니까.

애완용품 박람회가 열리고 예쁜 개 콘테스트가 열리는 등 주목을 받긴 하지만 역시 선천적 미모보다는 주인의 자금 능력과 손길에 따라 개의 인생은 천차만별이 된다. 그러니 개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반쯤 길든 동물의 운명이다.

그러니 운명이 인간의 손에 맡기어진 오래된 동반자인 개들에게 인간은 최소한의 보호를 보장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반려 동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 개들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꼭 인간에게 봉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비록 법과 제도를 양유하는 성인만큼의 의사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개에게도 생각하는 지능이 있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수성이 있음은 널리 알려졌다.

이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해악을 미치고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투영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 가능하다. 혹자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마당에 웬 개의 권리 운운이냐고 성급히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환경은 인간이 살아가는 바로 그 주변에 관계된 것들의 총체이며 동물은 인간이라는 이종(異種)과 공존하여 살아가며 인간과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는 생명체이다. 그래서 동물의 생명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과 무관하지 않다.

동물보호와 생명 존중

2002년 EU(유럽연합)에서 새롭게 제안된 동물복지법은 돼지를 사육, 수송, 판매, 도축 과정에서 위생과 복지를 우선하여 고려해야 하는 복지 관련 규정을 강화하여 천명했다. 이는 돼지의 평소 습성에 걸맞은 환경을 돼지에게 제공함으로써 돼지가 살아가고 도살되는 과정에서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방안이다. 적합한 사육환경에서 다른 돼지와의 사회적 접촉을 보장하여 기른 돼지를 통해 돼지의 건강과 복지증진을 이루는 방안은 돼지의 육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먼 옛날 사람이 동물을 사냥하여 잡아먹고 동물이 때때로 마을 어귀에 출몰하던 시절에는 동물을 취급하는 비 생명적인 산업시스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량축사에서 운동도 없이 갇혀 자라는 가축들이 동족의 고기를 사료로 먹고 광우병을 일으켜 인간에게 전이하는 사태가 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다. 단순히 돼지의 맛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돼지의 습성에 거스르지 않는 환경을 제공하는 산업 시스템이 거꾸로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시대이다.

세계적으로 동물에 대한 권익보호 조치는 1876년 영국이 동물학대방지법을 제정한 최초 사례 이후 나라마다 속속 만들어져 강화되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도 1991년 처음 제정된 뒤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오는 중이다. 이에 따르면 동물의 소유자 또는 관리자는 동물에게 적합한 사료를 제공하고 급수, 운동, 휴식 및 수면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질병에 걸리거나 부상한 경우에는 신속한 치료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동물을 이유없이 죽이거나 고통을 주거나 학대하면 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동물보호법이 제정되어 있음에도 시행을 위한 구체적 부칙과 규정이 미비하여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동물 보호의 논의는 해묵은 보신탕 찬반론과 문화 상대주의 운운의 핀트가 어긋난 과거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또 한편 인간의 빈곤을 다루기에도 모자란 마당에 사치스런 논의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동물의 참혹한 사육과 도살을 방지하고 친생태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비용은, 그러한 과정을 무시하여 온갖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인간에게 돌아오는 위험을 부담하는 비용에 비해 지나친가? 단순한 허영으로 동물의 털가죽을 벗겨내어 만들어진 옷을 사입기 위해 지불하는 어마어마한 돈은 다른 식으로 쓰인다면 얼마나 많은 굶주린 아이를 먹일 수 있는가?

개를 길들인다는 명목 하에 개의 습성을 무시한 채 인간의 자기 중심적 즐거움을 위해 구타와 체벌로 훈육시키는 것은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다른 세계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동물 보호라는 것은 사람을 굶겨가며 비싼 미용비로 동물을 치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당장 인도의 성자 간디처럼 평생 채식을 하자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중심으로 이종(異種)의 생명체를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일방적 시각을 반성하고 사람과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소수자에 대한 배려 없음에 반성하는 사고의 전환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 행복한 카시페로>의 원본
<오! 행복한 카시페로>의 원본
개라는 은유, 사실은 사람의 이야기

<오! 행복한 카시페로>는 개를 의인화하여 화자로 설정하였다. 동물을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 편의대로 의인화하는 기술방식은 위험하다. 그러나 그라시엘라 몬테스는 개의 습성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동물을 인간의 방식대로 재영토화 하는 위험을 피해가고 있다. 자본의 독식에서 밀려났던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지한다면, 기본적 욕구를 달성코자 험난한 여정을 거치는 카시페로의 서사는 인간 가운데 약자를 묘사하는 훌륭한 은유로 읽힌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모순투성이의 사회에서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를 모색했던 카프카의 작품에서 동물 변신은 즐겨 사용되던 탈주선 긋기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물 변신은 모든 형태, 모든 의미화, 기표, 기의를 와해시켜 비형태, 비영토화의 물결, 무의미의 기호에 자리를 내줌으로써 모든 가능한 도피선을 긋게 해준다고 평했다. 오늘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쉽게 짓밟듯 인간이 개를 버리는 사회에서 <오! 행복한 카시페로>는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문제적 화두를 던진다.

비슷한 시사점을 주는 한국 작가의 시로 남미의 그라시엘라 몬테스에게 화답해본다.

하늘이 보시기에 / 개를 버리는 일이 / 사람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 사람들은 함부로 개를 버린다 // 땅이 보시기에 / 개를 버리는 일이 /어머니를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 사람들은 대모산 정상까지 / 개를 데리고 올라가 / 혼자 내려온다

산이 보시기에도 / 개를 버리는 일이 / 전생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 나무가 보시기에도 / 개를 버리는 일이 / 내 생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 사람들은 거리에 / 개만 혼자 내려놓고 /이사를 가버린다 // 개를 버리고 나서부터 / 사람들은 / 사람을 보고 / 자꾸 개처럼 컹컹 짖는다

개는 / 주인을 만나려고 / 떠돌아다니는 나무가 되어 /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다가 // 바람에 떠도는 비닐봉지가 되어 / 이리저리 거리를 떠돌다가 / 마음이 가난해진다 // 마음이 가난한 개는 / 울지 않는다 / 천국이 그의 것이다 (정호승의 '유기견(遺棄犬)' 전문)

덧붙이는 글 | * <당신의 책,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 알라딘 개인서재, SBS U포터에 개제합니다.


오! 행복한 카시페로

그라시엘라 몬테스 지음, 이종균 그림, 배상희 옮김, 푸른숲주니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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