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동북아 순방을 앞두고 가진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그는 16일 워싱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일본에 대한 동맹으로서 안보공약을 재확인하면서, "동맹관계의 혜택(benefits)을 누리는 동시에 그에 따른 부담(burden)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미 유엔 안보리 결의안 이행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대북 제재에 들어간 만큼, 이러한 발언은 한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라이스는 남북경협 사업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 "한국이 북한과의 활동 전반에 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 강행 및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근거로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사업의 중단을 이끌어내는 것이 한국 방문의 주된 목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한국 정부가 부분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전면적인 참여도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성의'조차 안 보이는 미국
이와 같은 한국에 대한 압박은 핵무기 등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가 테러집단 및 다른 반미국가들에게 이전될 경우, 미국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고, 미국의 안보 지원을 받고 있는 동맹국이라면 이를 저지하는데 따르는 부담도 함께 져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이러한 일방주의는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조차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라이스도 기자회견에서 "자연스러운 우려"라고 인정한 것처럼, 북한에 대한 고강도의 제재 및 봉쇄는 무력충돌까지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스는 이러한 조치가 "유엔 헌장 7장에 따른 결의"라며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감수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혹시라도 북한과 우발적인 충돌이 발생한다면, 이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한국의 존망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 세계에서 군사력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승패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상호확증파괴'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인 미국이 한국에게 이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은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친구에게 목숨까지 내놓으라는 '조폭 논리'와 다름 아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 등 오늘날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이 부시 행정부에게 있다는 한국인의 '정확한 인식'과 맞물려 반미감정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한미동맹, 과연 누가 수혜자인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는 한미동맹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안보공약이라는 시혜를 베푸는 관계로 보면서, 이제는 한국도 부담을 져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부질없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미국이 한국인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한반도를 분단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은 물론 오늘날의 위기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이 이러한 역사적 책임을 망각한 채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구원해줬다는 점만 강조한다면, 한미관계에 대한 균형잡힌 인식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주둔시켜온 것 역시 남한에게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풀었다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혜택'이 미국에게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동맹의 혜택은 더할 나위 없이 누려온 반면에 부담은 크게 줄여왔다. 두 차례에 걸친 한국의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및 이에 따른 비용 한국에 전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관철, 그리고 최근 미군기지 환경오염 치유 비용 전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전세계 어떤 동맹국으로부터도 누리지 못한 혜택을 한국으로부터 받아왔다.
이에 반해 부시 행정부는 동맹국으로서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한국이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가장 큰 요구 사항, 즉 대북정책의 변화를 끝끝내 거부한 것이다.
더구나 대북정책를 변화시켜 북한과 진지한 협상에 나서는 것은 큰 돈이 들어가는 것도, 미국의 안보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도움이 된다!). 즉, 대북정책의 변화는 미국의 부담이 아니라 동맹국으로서 최소한의 성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얼굴 붉힐 때
대단히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북핵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부시 행정부는 기세 등등한 반면에, 대북포용정책을 계승했다고 자임해온 노무현 정부는 이렇다할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노무현 정부는 부시 행정부에게 당당히 말해야 한다. 단순히 '우리의 사정을 봐달라'는 읍소가 아니라, 미국의 잘못은 잘못대로 지적하면서 '문제해결 지향적인 자세'를 촉구해야 한다. 미국과의 갈등을 두려워한다면, 한국이 주도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사라지고, 감당하기 힘든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무현 정부는 라이스의 방한을 부담이 아니라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정부가 라이스에게 제재 일변도의 방식으로는 상황만 악화될 것이라는 점을 주시시키면서, 북한과의 직접 대화 및 대북 금융제재에 있어서 유연성을 보일 것을 촉구한다면, 반전(反轉)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이스는 한국을 방문한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찾을 예정이다. 한국이 라이스에게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대북 제재에 동참한다면, 라이스를 이를 근거로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할 것이다.
반면에 한국이 라이스에게 할말을 하는 용기를 보여준다면, 반대로 중국과 러시아는 이를 근거로 라이스를 설득·압박할 것이다. 한국 외교의 창의적인 용기가 절실히 요구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