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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을 보다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동명의 영화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 사실 집사람이 그 영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CF에서 돈 번 연기 못하는 배우들이 연기장난 하는 그런 영화 아냐?"라고 반응했다.

우리 인간세상에서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실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어찌 보면 세상을 교묘히 움직이는 것 중 하나가 선입견과 편견일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함정에 종종 빠진다. 마치 한국정치의 보이지 않는 큰 손이 바로 비이성적인 지역감정인 것처럼. 그런 점에서 나도 개혁의 대상이다.

신문을 보면서 내가 처음 가졌던 생각이 편견일 수도 있다고, 다시 선입견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주로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른 반응들을 보여주었지만 어느 정도 공통적인 의견은 영화보다 책이 훨씬 낫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는 좀처럼 없으니까. 최근 잘나가는 영화 <타짜>도 원작인 허영만의 만화를 읽은 사람들은 감동이 덜하다고도 하니까 말이다. 그럼 원작을 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 선 공지영의 소설을 최근 읽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한참 혈기왕성하던 20대 중반이었던 1990년대 초, 그녀가 30줄에 들어설 무렵에 발표한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와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이 나와 그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소설에서 나는 아직은 덜 다듬어졌지만 격동의 80년대에 방황하던, 치열하게 고민하던 386젊은이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글도 설익었으나 나름대로의 에너지가 느껴졌었고.

그러나 그 후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몇 가지였는데, 우선 1990년대 중반 군에서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설은 접고 영화보기에 몰두했다.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고 이성이란 존재에 대해 극도의 회의에 빠졌던, 그리고 군생활로 인생의 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으면서도 서서히 삶의 스트레스에 젖어들던 당시 나에게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영화는 일종의 도피처이자 인생공부의 소재였다.

두 번째는 그녀의 소설이 잘 팔리는 것에 대한 일종의 삐딱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으니까 왠지 그걸 거부하거나 무시해버리고 싶은...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허영심, 삐뚤어진 엘리트주의, 선민의식 같은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세 번째는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일상생활에서 인격이 의심스러웠던 사람들이 공지영의 소설을 끼고 다니며 문화인 행세를 하는 것이 역겨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도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내가 그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바로 위의 문장들을 보면.

한동안 외면하던 그녀의 소설을 읽으려니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책 한 권 읽는 것 가지고 햄릿처럼 왜 이리 생각이 많으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일상에서 책 한 권을 잘못 선택하는 것은 일주일을 날려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읽었다. 더구나 소설의 소재는 그동안 조금 관심을 가졌던 사형제 폐지였으니까.

우선 소설의 구성이 특이하다. 주인공인 문유정의 1인칭시점의 글과 사형수인 정윤수의 블루노트가 병행된다. 블루노트는 사형수인 정윤수가 감옥에 있는 동안 틈틈이 적은 자신의 인생에 관한 기록들이다. 어떻게 해서 자기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이런 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적은 글인 셈이다.

독자들은 소설의 전개와 더불어 정윤수가 왜 사형수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된다. 주인공 문유정은 잘나가는 집안에서 출생한, 그리고 집안의 배경으로 미술대학 교수가 된 사람이지만 어릴 적 큰 상처를 입고, 또 가족에게 배신당한 후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막' 살던 사람이다. 자살도 세 번이나 기도했던 전력이 있고. 그런 그녀가 수녀인 고모의 권유로 사형수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의 의미, 사랑과 용서에 대해 깨닫게 되는 그런 과정의 이야기다.

작가 공지영은 소설 내내 독자들에게 묻는다. 과연 정녕 사형제도는 필요한 것이냐고.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말한다.

"누구나 원래부터 선하거나 악한 사람은 없고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런데 성장과정에서 극심한 폭력이 시달린 사람은 뇌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져 판단력과 죄책감 등이 거의 마비된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네 의자로 극복하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당연히 범죄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고 충동을 억제못하며 일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사형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폭력이 폭력을 가져오고 전염되어 또 다른 폭력을 낳는데 이를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로 응징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결과일 뿐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소매치기를 처벌하기 위해 소매치기들을 사형에 처했는데, 처형장소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이 틈을 노려 소매치기들이 극성을 부린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특히 사형수인 정윤수의 블루노트 내용은 여러 번 눈가를 촉촉하게 했다.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회개하여 세상이 달리 보이고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부분, 그리고 편안히 죽으면서도 공포에 질리는 모습들은 사형제의 존치여부에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다. 맞다. 개인에게 모든 걸 추궁할 수는 없다. 자라온 환경, 성장과정이 그 사람의 인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침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과연 내 가까운 사람들이 흉악범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때 과연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아직까지는 자신이 없다. 머리로는 사형제도의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뉴스에서 잔혹한 범죄소식을 들으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여전한데...

얼마 전 용산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성추행한 범인이 현장검증에서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를 연발할 때 딸을 키우는 부모라 그런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었다.

죽여 놓고 그런 무책임한 말만 하면 피해자 가족들에게 어쩌란 말인가. 물론 그런다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님은 너무나도 잘 알지만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쩌란 말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나는 가족이 떠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많은 국민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전직대통령과 현직대통령이 모두 사형제 폐지론자들이고 국회의원 150여명이 사형제 폐지법안을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사형제가 폐지되지 못하는 것은 국민감정이 그야말로 감정 수준이지만 무시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사형제 폐지 반대여론이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제 폐지를 관철시켰다는 것, 선진국들 가운데 사형제를 존치시키는 나라는 미국, 일본 밖에 없다고 폐지론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 나라들과의 단순 비교는 곤란할 듯싶다. 개인의 성장과정이 다르듯이 국가의 분위기와 국민의식도 다를 테니까.

소설에서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의 외삼촌이 이런 말을 한다. "아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일 뿐이야. 진짜 중요한건 깨닫는 거야.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 맞다. 나는 아직 사형제폐지의 정당성에 대해 머리로만 아는 수준이다. 이를 진정으로 깨닫고 내가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야 자신 있게 사형제폐지를 찬성할 수 있지 않을까.

말로만 정의와 진보, 개혁을 외치면서도 막상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는 행하지 못하다면 그건 껍데기겠지. 하지만 어쩌랴. 아직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몇몇 사람들을 용서하지도 못했고 용서할 생각도 없는데...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사형제 폐지의 당위성에 대한 이해도는 훨씬 높아졌다. 그리고 이처럼 나름대로 진지하게 사형제 폐지에 대해 고민하고 글까지 쓰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 나 자신도 잘 실천은 못하지만 용서와 관용의 미학과 기쁨도 얻으며 오랜만에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히 권하고 싶다.

"Dead Man Walking!" 미국에서 사형수가 형장으로 나갈 때 교도관이 하는 말이다. 뭐, 번역한다면 "사형수 입장!" 정도쯤 되겠지. 7~8년 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명화 <쇼생크탈출>의 주인공 팀로빈스이 감독을 하고 숀펜과 팀로빈스의 12살 연상의 부인 수잔 서랜든이 주연한 영화다.

수잔 서랜든은 사형수를 이해하려는 수녀로, 숀펜은 사형수로 연기했다. 특히 숀펜은 가증스럽고 뻔뻔하며 죽을 때는 비굴하고 불쌍한 여러 얼굴의 사형수를 기가 막히게 연기해냈는데 정작 아카데미 주연상은 수잔 서랜든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수상식장에서 내 연기가 돋보인 것은 숀펜의 열연 때문이었다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우수함은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관객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점이다. 팀로빈스는 영화에서 사형제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관객은 처음부분에서는 숀펜의 가증스러움과 흉악함에 치를 떨다가 끝부분의 사형장면에서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팀로빈스는 영화를 통해 묻는다.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대답은 관객의 몫일뿐이다.

오랜만의 공지영소설과의 만남. 좋았다. 하던 일을 팽개쳐가며 읽었으니까. 하지만 아쉬움이 있다면 이 부분이다. 작가는 정윤수의 블루노트에서 실제로 그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의 묘사는 의도적으로 뺐다.

당연히 독자는 정윤수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시종일관 유지해간다. 이는 사형제 존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판단을 자칫 흐리고 감정에 치우칠 수 있다. 이런 문제일수록 자신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 모두에서 생각해봐야 하는데 말이다. 팀로빈스는 냉정하게 살인장면을 묘사했는데. 그것도 마지막 사형장면에서 숀펜이 죽어가는 모습과 오버랩 시키면서. 옥의 티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떠랴.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이지, 학술논문이 아닌 것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해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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