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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드리'의 억새밭
'쇠나드리'의 억새밭 ⓒ 김선호
강원도 인제군 진동리 계곡을 지나서 점봉산 곰배령 가는 길에 만난 '쇠나드리'는 5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소가 날아갈 바람이 분다'고 해서 쇠나드리란 이름을 얻은 그곳을 5년 전에 찾았을 땐 길이 질퍽이는 비포장 도로였지요. 어렵게 차가 통과할 정도로 좁은 길 양쪽에 억새가 숲을 이루고 사방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하얀 억새꽃이 햇살을 받고 물결치듯 일렁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느껴지던 그 세찬 바람을 기억합니다. '소가 날아갈' 바람의 위력을 직접 경험했던 셈이지요.

땅이름과 자연현상이 맞물려 신비함을 자아내던 5년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쇠나드리 주변은 도로포장이 말끔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넓어진 도로를 내느라 깎여 나간 억새 숲만큼 바람도 잦아들어 있었습니다. 날이 그닥 춥지 않은 까닭도 있었겠지만 바람이 순하게 부는 쇠나드리는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특별한 허가가 필요한 곳

산의 소박함을 닮은 나무간판
산의 소박함을 닮은 나무간판 ⓒ 김선호
곰배령 매표소까지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진동리까지 수월하게 들어섭니다. 그러나 곰배령을 가기 위해서 일정한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산림청의 허가를 받는 일이었지요. '식물유전자 보호지구'로 지정된 아름다운 자연유산인 곰배령을 지키기 위해서 매우 적절한 조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몇 번의 전화통화와 팩스를 이용해 마침내 곰배령 입산을 '허' 한다는 허가를 받았을 땐 참 뿌듯했습니다.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의무조항 때문이었을까요, 곰배령이 어쩐지 비밀스런 느낌마저 듭니다. '아름다운 비밀' 쯤으로 이름짓고 싶은 그 느낌은 곰배령 가는 초입에서 만난 강선리 마을이 더욱 강하게 풍기고 있었습니다.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마을이라니, 아름다운 비밀에 신비로움이 덧입혀 지는 순간입니다. 숲과 마을이 그토록 이나 평화롭게 어울리는 예를 일찍이 본적이 없습니다.

점봉산의 한 봉우리에 위치한 곰배령은 그 이름에서부터 '산'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느낌을 줍니다. 시종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길은 산을 오른다 기보다는 '산책'의 개념에 충실한 듯 보입니다. 이런 길이라면 하루종일 걸어도 행복하겠다 싶은.

아, 이쁜 숲!!
아, 이쁜 숲!! ⓒ 김선호
단풍든 숲과 아이들
단풍든 숲과 아이들 ⓒ 김선호
계곡을 따라 오솔길 같은 산길을 걸었던 날은 단풍이 절정이었습니다. 당단풍나무라 함은 가장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가을 숲을 수놓는 단풍나무인데, 곰배령엔 당단풍나무가 무지 많습니다. 주로 계곡 가에서 보게 되는 이 단풍나무가 곰배령 초입부터 계곡을 포함한 산길 양쪽에 무리 지어 자라있어 숲이 온통 붉게 물들어 버렸습니다.

가을가뭄으로 단풍이 타들어 간다는 뉴스를 접했던 터라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계곡엔 풍부한 물이 흘러 넘칠 듯 합니다. 나무들이 무성한 까닭이고 숲이 좋은 때문이겠지요. 자연히 단풍 빛도 고울 수밖에 없습니다.

곰배령엔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단풍이 들고 더러 낙엽이 떨어져 산길에 수북히 나뭇잎이 덮여 있기도 합니다. 산길에 덮인 나뭇잎에선 마른나무의 향기가 은은히 퍼져 나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성 마른 나뭇잎이 몸을 들썩이다 다시 산길에 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고요하기가 이를 데 없어 산을 걷는 일이 곧 명상이 되는 길이어서 더 없는 평화로움을 주는 곰배령은 산이 가진 미덕을 고루 갖춘 산인 듯 싶습니다.

당신이 주인입니다 '곰배령 숲 카페'
당신이 주인입니다 '곰배령 숲 카페' ⓒ 김선호
계곡에 가로놓인 징검돌을 건너니 비로소 가파른 산길이 시작됩니다. '주인을 찾으시나요. 당신이 주인입니다' 라고 쓰인 나무간판이 발길을 붙잡습니다. 일회용커피와 녹차티백이 놓여있고 화덕에 주전자가 놓여있습니다. 산 속에서 만난 '주인 없는 산속 카페'입니다. 당신이 양심의 주인이라고 은근슬쩍 협박(?)을 해 놓았지만 이 한없이 평화로운 숲길에선 양심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들어올 틈이 없어 보입니다.

목적지에서 느끼는 아쉬움

보기 좋게 자란 산죽이 오솔길에 운치를 더하고
보기 좋게 자란 산죽이 오솔길에 운치를 더하고 ⓒ 김선호
초입부터 조금씩 눈에 띄던 산죽(대나무)이 본격적으로 산길 양쪽에 포진해 있는 길이 이어집니다. 특이하게도 속새가 파랗게 자라 단풍과 조화롭게 어울립니다. 마치 산 속에 향이라도 꽂아 놓은 듯한 속새 무리가 지천입니다. 곰배령의 생태가 매우 특이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절로 평화가 깃 드는 곰배령 오르는 길이 그래서 오히려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왔던 발자국 하나, 작은 흔적 하나라도 남겨두면 큰일 날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계곡이 좁아드는 산 중턱에도 여전히 감탄스러울 만큼 계곡에 물이 풍부하게 흘러듭니다. 마치 초여름을 연상케 할만큼 이끼가 푸르게 낀 숲이 촉촉함을 간직하고 있는 게 인상적인 산길입니다.

산 중턱엔 곰배령의 늦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단풍든 나뭇잎 보다 낙엽이 더 많아 보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잦습니다. 가끔 산새가 울어 화음을 더하고 여느 산보다 훨씬 많은 다람쥐들이 겨울양식을 모으느라 부산을 떠는 모습을 봅니다.

목적지에 다 닿았다는 사실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던 산은 오직 곰배령이 유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시야가 환하게 열리고 엷은 안개에 싸인 넓은 벌판 같은 등성이가 나타났을 때 나도 모르게 에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 시간쯤, 아니 몇 시간이라도 더 걸어도 좋을 곰배령 오르는 길이 그렇게 끝이 나 있음이 적이 실망스러웠던 탓입니다.

아스라한 안개에 싸인 늦가을의 곰배령
아스라한 안개에 싸인 늦가을의 곰배령 ⓒ 김선호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가을이 깊어 간다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가을이 깊어 간다 ⓒ 김선호
봄에서 가을까지 숱한 꽃들이 천상의 화원을 이루어 낸다는 곰배령 능선엔 휑한 바람만 그득합니다. 딱, 늦게 핀 양지꽃 두 송이, 엉겅퀴 한 송이를 보았을 뿐입니다. 물론 곰배령 오르는 길에서 본 단풍이 충분히 고왔습니다만,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아스라한 안개에 젖은 늦가을의 곰배령도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무리 지어 진군하듯 밀려온 안개가 순간적으로 잦아들면서 산 아래쪽으로 몰려가는 신비를 보여준 곰배령 이었습니다.

곰배령 입구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몸이 아프셔서 서울 살다 이사왔다고 합니다. 팔순을 넘기고도 여즉 건강한 것이 산 덕분이라며 웃으십니다. 커피를 팔고 있길래 얼마냐 물으니 알아서 놓고 가랍니다. 할아버지와 동향이라고 특별히 반가움을 표시하는 아들녀석은 급기야 산에서 주워 온 도토리 한 알을 마당 가운데 심습니다.

풀들이 제멋대로 자란 작은 마당 한가운데를 파는 아들녀석에게 할아버지가 도토리 심을 자리를 알려줍니다. 내년 봄에 도토리가 싹을 꼭 틔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내년 봄 곰배령을 다시 찾고 싶네요. 그때는 '천상의 화원'으로 변신한 곰배령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곰배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할아버지
곰배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할아버지 ⓒ 김선호

덧붙이는 글 | 10월 15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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