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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사가들은 지금 이 시기를 길고 긴 반동의 터널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진보학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렇듯 진보민주진영 곳곳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진보민주진영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따갑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 데, 보수진영에서 던진 '개혁피로증'이라는 반론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진보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오마이뉴스>는 진보민주진영의 고민과 전망,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담론을 모으기 위해 심층 기획 글을 내보냅니다. 다음은 하승창 함께하는시민행동 전 사무처장이 보내온 글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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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위기라거나 침체하고 있다는 진단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80년대와 90년대 사회운동의 성장은 확실히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 그 시절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가져 온 사회적 변화엔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사회 변화 따라잡지 못한 것이 위기의 본질
그러나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그 성과만을 기억하며 현재의 사회운동을 존중하고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의 성과에 힘입은 사회 변화가 오히려 운동의 과제와 방식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운동이 이를 미처 따라가고 있지 못한 것이 사회운동에 대한 지지가 과거와 같지 않은 이유일 뿐 아니라 운동 위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물론 2000년 총선연대의 성과나 노무현 정부시대 사회운동의 영향력은 사실 사회운동이 자기 능력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며 최근 사회운동 현상은 운동이 제자리를 찾는, 정상화 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위기란 운동의 주체가 갖는 인식인 만큼 그같은 인식차는 향후 운동의 과제나 방향에서 다른 방도를 취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분화되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운동의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운동의 다양성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줄맞춰 나가지 않는 그룹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이 여전한 상태야말로 위기의 징후이기도 하다.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이 과거부터 우리가 익히 아는 일정한 요구와 과제에 대해서, 설사 지금에 와서 좀 의문이 있더라도 우리는 한울타리이므로 개별 그룹들이 여전히 금과옥조로 여기는 슬로건에 대해서는, 연대활동으로 품앗이해주는 분위기가 사회운동 전반에 남아있는 한 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렵다.
당연히 기존에 주장해 왔던 슬로건과 구호에 대한 성찰과 재해석이 요구되고 있지만 무슨 경전이나 되는 것처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위기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서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운동의 위기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운동 내부에 대해 지금부터 나 자신을 포함하여 스스로, 그리고 서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간 우리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 사람에게 우리가 온전하게 그의 문제의식을 귀담아 들으려 했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대개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문제제기를 했다거나 지금은 운동의 현장에서 멀어진 사람이라거나, 버릇없는 후배들의 철없음이라거나 하는 비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한 문부식의 비판이 그러하였고, 노동운동에 대한 박승옥의 비판이 그러하였으며, 민족주의에 대한 임지현의 비판이 그러하였으며 여성운동에 대한 내부비판이 그러하였다.
나는 정말 편견없이 논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평등한 교육을 위해 고교평준화는 정말 변화할 수 없는 정책일까? 그것이 공교육을 강화하는 핵심적인 방안일까? 평준화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 더 높은 교육의 질, 혹은 다른 교육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은 특목고로 몰려가거나 대안학교로 건너가고 있지 않은가?
비정규직 해법은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면 되는 것인가? 이미 비정규직이 취업자의 절반을 넘었고, 변화하는 고용형태로 볼 때 비정규직 취업이 줄어들 것 같지 않다면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방향이 비정규직의 철폐가 아닌 다른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문제제기와 도전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새로운 아젠다가 될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다름'과 '논쟁'을 인정해야만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생태와 평화, 인권, 젠더라는 다른 시각과 관점을 통해 세계를 보려고 하는 흐름과 기존의 사회운동이 부딪히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녹색평론 김종철 편집인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진보진영 내에서도 성장주의에 기초한 주장과 녹색의 주장이 다르지 않은가. 녹색? 젠더? 아 다 좋은 이야기잖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 라는 이야기는 별로 논의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같은 견해를 유지하는 쪽도 있겠지만 다른 견해가 나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 설사 자신이 보기에 틀리더라도 사회운동내부에서 다른 견해가 나와서 '논쟁'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성찰할 수 없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변화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인식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예전 같지 않음에 대해 혹여 노무현 정부의 실정이 운동권 전체도 매도하게 만들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노무현 정부가 언론과 기득권 집단의 저항을 실정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에 대해 최장집 교수가 자기의 무능을 가리는 일이라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권의 실력 없음을 가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달라지고 있다
과연 90년대에 성장한 시민단체들의 활동방식과 과제에 대해 자신은 물론 서로에게 엄히 묻고 있는가? 시민단체를 둘러싼 기업으로부터의 모금문제 같은 논란이 내부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할 말이 있고, 또 단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지만, 시민운동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기준과 잣대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시민운동 지도자들이 모두가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면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과 관계로 진출하면서 시민운동이 마치 정계나 관계진출의 정거장처럼 되어 버린 현실이 시민운동의 위상을 결국 특정 정치집단의 후위대처럼 인식하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90년대를 시민운동과 함께 살아 온 나 자신 역시 이러한 비판과 지금의 현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앞서 한 이야기들은 나 자신에게 고스란히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있다. 분명한 것은 90년대 운동이 이제 그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운동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90년대의 시민운동에게 그 사회적 지위를 내어주듯이 이제 다른 성격의 운동들이 조직되어야 할 때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새롭게 생성되고 성장하고 있는 운동들을 보고 있다. 생태와 평화와 인권을 가치로 내걸고 2000년 이후 활동 폭을 넓혀 가고 있는 운동들과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풀뿌리 운동이 그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운동은 싹트고 있다
과거와는 성격이 다른 운동들이 성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성장하는 데 인터넷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새삼스럽게 강조할 일은 아니다. 파병반대운동과 평택범대위에 몰려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평화와 인권관련 단체들, 자전거운동, 지역화폐운동, 대안학교, 성미산과 지리산 일대의 지역운동 처럼 기존의 질서와 관계없이 성장하고 있는 운동들이다.
90년대 시민운동의 지부로 활동하거나 관련 맺었던 지역단체들은 같은 고통의 뿌리를 안고 있지만 그와 관계없이 성장하고 있는 지역의 운동들은 이제 생성되고 있는 중이라 그 힘찬 돋움이 전혀 다르다.
이런 새로운 운동들을 네트워크하고 담론을 제공하는 운동은 여전히 생성되고 있지 못하다. 90년대의 관행이 뿌리깊고, 90년대의 시각과 가치와 관성이 우리를 욱죄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성장하여 사회운동을 떠받쳐 온 대변형 시민운동의 혁신과 함께 새로이 성장하는 운동을 토대로 하여 90년대의 시각과 가치와 관성을 벗어버리고 다른 세계에 또 다른 도전을 해야 한다.
지금부터의 도전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도의 수준에서 시작되면 안 된다. 그것은 다시 사회운동을 약간 개혁적인 정당의 우군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우둔한 짓이 될 것이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위치에서 변화한 우리 사회를 해석하고 공동체가 가져야할 새로운 가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녹색과 보라색과 적색으로 표현되었던 가치들이 부딪히면서 새로운 색깔의 가치와 과제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처럼 시민운동은 정치적 중립이라면서 보수정당들의 심판관 노릇을 하는 어줍잖은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분명히 하여 생활공동체 곳곳에서 실현하는 일에서부터 성과를 해석하고 제도화하는 일까지의 과정을 조직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우리 사회에 실현해 가는 도전이 필요하다.
무엇 때문에 운동하는가, 우리에게 다시 물어져야 할 때이자, 90년대의 시각과 관행과 관성에서 벗어나 운동의 새로운 세계로 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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