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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92년 7월 호주 현지조사 후 해외희생동포위령사업회에서 작성한 '카우라 수용소 현지 조사보고서'를 발췌한 것이다. 다만 보고서에 몇가지 오류가 있어 바로 잡고자 한다. 보고서에 등장하는 '다케오 마쯔모도'의 정확한 일본이름은 '타카오 마츠모토'(松本貴男)로 한국이름은 박귀남(朴貴男)씨다. 박씨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호주측 증언도 오류로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일본을 거쳐 한국에 무사귀환해 경찰계에 투신했다가 지난 85년 사고로 사망했다. (관련기사 참조)

또 보고서는 카우라 전몰자 묘지에 묻힌 한국인을 26명으로 추정했지만, 호주의 '카우라 한국인 희생자 추모사업회'(회장 이회정)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명(이인대)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대탈출사건 때 14명의 한국인이 희생됐다는 보고서 내용도 수정되어야 한다. <편집자주>
4) 카우라에서의 조사내용

가.마리온 스타 여사는 어떠한 사연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44년 8월 5일 일본군 포로 대탈출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였더니 일본군 포로 탈출사건 때 일본군 포로에 의해 사망한 포로수용소 근무 영국 군인 알 존슨이라는 사람과 스타 여사의 조모님의 여동생이 결혼할 계획이었는데 상대방의 사망으로 결혼하지 못한 비운의 사연이 있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데다가 스타 여사는 지금 '50년 후의 카우라시'라는 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카우라시에 대한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조사하고 있고, 또 평화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스타 여사는 카우라 현지 언론에 자유기고를 하면서 저서활동을 하는 카우라 지방에서는 인정받은 현지 언론인이자 문인이라고 한다.

나.①돈 깁브르씨는 현재 카우라 일본공원조성위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친일인사이다.

②깁브르씨는 카우라에 있었던 연합군 포로수용소 경비원들이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가는 일이 자주 있어서 그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었으며 현재까지 일본을 50여 회 이상 가서 2차대전 당시 카우라 포로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한 생존자들을 만나 직접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③카우라 일본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왜 죽었으며 왜 그곳에 묻혔느냐고 물었더니 1944. 8. 5일 카우라 포로수용소 일본 포로 대탈출사건 때 영국군과 호주군 4명이 죽었고, 일본군 포로 1000여명이 탈출하다가 231명은 죽고 107명은 부상당했는데, 231명은 탈출사건 때 죽은 사람들이고, 그외는 카우라 근처 각지에서 죽은 일본인들을 1964년도 공동묘지를 만들 때 이장해 매장한 것이라고 했다.

④카우라 포로수용소에는 몇 명의 포로를 수용했으며 그중 한국인은 몇 명이나 있었으며 카우라 일본인 공동묘지에 한국인이 몇 명 매장되어 있고 그들의 성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카우라 포로수용소에는 A, B, C, D BACK에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수용소를 만들어져 있었는데 A.BACK에 일본인포로 1000여명, B.BACK에 일본인포로 1000여명, C와 D BACK에 이태리인 포로 각각 1000여명씩 수용되어 있었는데 한국인포로는 A막사에 일본인포로와 함께 약 50명 정도 수용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2차 대전 중에는 한국인이 일본군에 포함된 것을 깁브르씨는 몰랐다고 말한다. 1957년도 일본 외무성의 야마시다라는 사람이 와서 전몰자 유골을 일본으로 가져 가려고 하다가 호주정부가 허가하지 않아 실패하고 그 당시 '코세쇼' 단체를 만들었다가 후에 스스기 주호주 일본대사가 카우라에 땅을 할애해주면 일본인 전몰자 공동묘지도 만들고 일본문화센터도 만들어 새로운 관광명승지로 개발하겠다고 제의하여,

1964년 10월 호주정부가 카우라에 일본인 정원을 조성하도록 땅을 정식으로 할애해주고 공동묘지를 만들도록 해 공동묘지에 일본인을 매장할 때 호주정부에서 가지고 있던 1944. 8. 5 포로대탈출사건 때 사망한 포로들의 명단을 가지고 와서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포함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카우라 일본인 공동묘지에 한국인 희생자 8-9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들의 성명은 모른다고 했다.

⑤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어느 곳에서 포로가 되었으며 어디를 거쳐 카우라까지 왔느냐 물었더니 파푸아 뉴기니아, 소로몬군도, 라바울, 뉴부리탄, 다이윈, 암본 등에서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

⑥1944. 8. 5 카우라 포로수용소 일본인 포로 대탈출사건의 진상을 물었더니 깁브르씨는 잘 모르고 B막사에 수용되었던 일본인포로 1000여명이 탈출하다가 321명은 당일 죽고, 107명은 부상당하고, 영국군과 호주군이 4명 사망하고, 약 9일간 체포작전을 벌여 탈출한 포로 전원을 잡아 다시 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종전 후 일본으로 귀환시킨 것으로 안다고 했다.

⑦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한국인과 일본인 포로들의 명단과 죽은 사람의 명단, 그리고 진상을 잘 아는 사람이나 기관은 어디냐고 물었더니 스타 여사가 나보다 더 잘 안다고 하면서 대답을 회피하였다.

⑧깁브르씨는 2차대전 당시 참전한 바도 없고, 카우라 포로수용소에 근무한 적도 없으며, 타인들로부터 듣고 아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다.스타 여사의 안내로 카우라 일본인 전몰자 묘지에 묘비를 일일이 확인하였더니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기수가 26기나 있었다. 그 명단은 별첨한다.

라.스타 여사가 근무하는 카우라 지방신문사로 나거 2차 대전 당시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행정, 통역, 경비근무를 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더니, 스타 여사는 여러 곳에 전화를 걸어 수용소 정보과에 근무한 바 있는 라이오넬 부어맨씨를 알아내고 부어맨씨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보맨씨에게도 전화를 해 우리 조사단 일행이 내일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친절히 소개해주었다.

마. 스타 여사에게 카우라 시청으로부터 카우라 일본인 전몰자 묘지에 매당된 사람들의 명단을 입수해 이동식군 앞으로 우송해줄 것을 부탁하고 시드니로 돌아왔다. 매장자 명단은 그후 10여일이 지난 후 이동식군에게 우송돼왔으며 이동식군은 다시 이용택 본회 회장에게 우송해주어 입수했다.

5)시드니 거주 라이오넬 부어맨씨의 증언.

가.부어맨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2세의 나이로 카우라에 있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정보과에서 호주 육군 2등상사로서 선임하사관이었고, 자기 밑에 4명의 직원을 데리고 A, B, C, D 4구역의 포로수용 막사를 한 사람이 1구역씩 분담하여 정보를 수집해 오는 것을 종합처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기에 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된 이태리와 일본인 포로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고,

1944. 8. 5일 발생한 일본인포로 대탈출사건의 진상도 직접 겪었고, 또 사건 후 진상을 조사하여 시드니에 주둔하고 있었던 상급군사령부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당시 포로수용소에 근무한 사람들 중 몇 명 되지 않는 생존자 중의 한사람인지라 진상을 누구보다 상세히 잘 아는 사람이다. 지금은 연로하여 유료 양로원 지역에 부인과 같이 살고 있다.

나.제2차 세계대전 중 호주 국내에 연합군이 관리하는 포로수용소가 몇군데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자기는 카우라 수용소에만 근무하다가 제대한 관계로 어디 어디에 수용소가 있었는지 정확한 것은 모르고 있으며,

다.카우라 수용소에는 A막사지역에 이태리군포로 900며영, C막사지역에도 900-1000여명의 이태리군포로가 수용돼 있었고 B막사지역에 일본인포로 1080명, D막사지역에 800여명의 일본인포로가 수용돼 있었다고 한다.

라.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호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파푸아 뉴기니아, 뉴부리탄 등지에서 연합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호주의 부라스반에서 4-5명의 포로 심문관에 의해 최초 심사를 마치고 '게이트혼 퀸스 랜드'(GAYTHURNE QUEENS LAND)를 거쳐 카우라 수용소로 왔다고 한다.

마.부어맨씨가 참고로 가지고 있는 서류 중에 1944. 3. 17-3.25일까지의 수용소 포로 실태 보고서에는 D막사지역에 한국인 150명, 중국인 4명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문서에는 한국인 88명이라고도 기록돼 있었다. 부어맨씨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인 포로들 중 거의 전부가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고, 일본인과 외형상 구별할 수 없어 본인이 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고 말을 하지 않는 한 알 수 없고, 또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포로로 취급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어맨씨가 보관하고 있는 문서를 복사하려고 했으나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들 한국인이나 일본인포로들의 정확한 명단은 아는 바 없다고 했다.

바.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대사가 왔고, 로마 교황청에서도 대사가 와서 카우라 수용소 포로들의 생활상을 조사하고 갔는데 포로 1인당 모포를 5-6매씩 보급했고, 식사도 경비병들보다 대우가 좋았다고 포로 스스로가 대답할 정도로 잘 대우했다고 한다. 수용소 생활중 반공호를 파는 노동과 취사당번 등에 동원될 정도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포로들이 한국인 포로들을 희롱하고 부당한 짓을 하고 포로가 되기 전 일본군 부대에서 한국인을 천대하듯 부당한 행위를 하기에 그때서야 같은 일본군이지만 종족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조사하였더니 한국인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일본군 병사들이 수용된 B막사지역에서 150여명을 일본군 하사관과 장교들을 수용하는 D막사지역으로 옮겨 수용했다고 한다.

사.카우라 일본인 전몰자 묘지에는 1944. 8. 5 일본인포로 대탈출사건 때 죽은 일본인 231명과 그외 호주국내 여러 곳에서 죽은 일본인 등 약 470명 정도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 가운데 일본인 대탈출사건 때 희생된 한국인 14명도 포함되었다고 했다.

아.카우라 수용소 일본인 포로 대탈출사건

①1944. 8. 5일 새벽에 일어났는데 그 동기는 포로수용소 당국이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거나 의식주의 처우가 불량해서가 아니며, 탈출이 성공돼 갈 곳이 예정된 것도 아니고, 당시 일본군인 정신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은 황군으로서 일본왕이나 나라를 위해 명예로운 일이지만, 포로가 되는 것은 자손만대로 불명예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들이 스스로 자살하기보다는 무모하게 대량탈출을 결행하면서 단 한사람이라도 당시 적군인 연합군 소속인 포로수용소 근무 군인을 죽이고 도망가면 탈출하는 일본인포로들을 사살할 것을 예상하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일본인의 정신을 백분 발휘하고 세계에 여론이 환기되면 연합군은 국제사회에서 난처한 처지가 될 것이며,

일본군이 여러 전선에서 많이 포로가 돼 연합군이 관리하는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니 이들의 처우가 앞으로 좋아질 것이고, 또 나가서는 다른 수용소에서도 탈출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 연합군의 사기와 전략에도 차질이 있어 전쟁수행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다목적이었다고 한다.

②탈출 전에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장기간 준비를 해왔는데 식당의 스푼, 호크, 칼 등으로 톱도 만들고 송곳도 만들고 예리한 칼도 만들었으며, 작업용 삽, 곡괭이 등으로 흉기를 만들어 은밀리에 보관했었으며 보급한 모포를 수용소 철조망에 걸치고 철조망을 넘어 탈출했다고 한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신체박약자들은 식당문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③대탈출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일본인병사 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B막사지역에서 일본인포로들과 같이 생활하는 한국인포로 다케오 마쯔모도씨가 일본인포로들이 대탈출을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을 밀고해 주었으나 당시 전시인지라 수용소에는 장비도 부족했고 인원도 모두가 나이가 많아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없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바 있는 노병들이어서 상부에 보고하였더니 기관총과 기관단총이 지급되어 요소요소에 배치해 두었다고 한다.

④급기야 1080명이라는 많은 일본인포로가 B막사지역에서 어두운 새벽에 탈출을 개시하고 돌을 던지고 은밀리에 보관했던 흉기들을 들고 경비 초소로 달려드는데 경비병들은 이미 설치한 기관총과 기관단총 노후화된 구식소총으로 무차별 난사를 했으나 죽음을 겁내지 않고 동료들의 시체를 뛰어넘고 덤벼들었다고 한다.

⑤이 사건으로 231명의 일본인포로가 사망했고, 107명이 부상당했으며, 수용소를 경비하던 연합군인 영국인과 호주군인 4명이 희생되었으며, 후에 안 일이지만 한국인포로도 14명이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⑥수용소를 일단 탈출한 일본인포로들은 카우라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 숨어서 계속 저항하는 것을 호주 군.경.관.민들이 합동으로 체포작전을 벌여 9일 만에 약 750여명을 생포해 다시 수용소에 수용했다고 한다.

⑦밀고해준 다케오 마쯔모도의 신병을 보호해주기 위해 다케오 마쯔모도씨를 계획적으로 자기가 수용되어 있는 B막사지역이 아닌 이태리군 포로수용지역인 A, C막사지역을 다른 사람이 보도록 배회하게 하고 수용소당국은 다케오 마쯔모도씨를 체포하여 남의 지역을 무단 침입해서 수용소 당국 막사내에 있는 영창으로 격리 수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다케오 마쯔모도씨는 일본인포로들로부터 많은 희롱을 당하였고 결국 죽었다고 한다.

⑨카우라 수용소와 일본인 대탈출사건과 이 수용소에 수용된 한국인 및 일본인, 그리고 사망자 명단과 자료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기관은 카우라 수용소에서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던 노벌씨와 '잉어처럼 죽어라'는 책을 쓴 해리 고든씨 등이며 기관으로는 ARCHIVES CENTER IN CANBERRE와 VICTORIA BARRICK IN PADDINGTON INTELLIGENT SECTION, 이 두 곳에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관한 모든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6.시드니 지구 노벌씨 증언.

가.노벌씨는 1943년부터 45년까지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어 통역관으로 근무했고, 6.25 때에는 육군 1등상사로 한국에 파견돼 참전했는데 정보업무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 후 호주에서 ALLIED TRANSLATION and INTERRO GATION CENTER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 부인은 일본인인데 일본어를 항상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서툴렀고, 노벌씨는 더욱 서툴렀다.

나.카우라 수용소에는 노벌씨가 근무한 곳이니 상황은 좀 알지만 노벌씨는 주로 수용소의 B, D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포로들의 책임자를 상대로 접촉하고 이들과 대화를 해 그들의 의사를 수용소 관리사무실에 전달하고 수용소의 의사를 일본군 포로 대표에게 전달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항은 잘 모른다고 했다.

다.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주로 파푸아 뉴기니아, 호주의 다이윈 등지에서 포로가 돼 호주의 부리스반과 게이트혼 퀸스 랜드를 거쳐 카우라에 온 것이라고 했고, 포로들이 카우라에 도착했을 때는 영양실조가 심했다고 한다. 카우라 포로수용소에는 일본인 포로 1000여명 정도, 한국인 80-100여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자기의 직책상 그들의 설명을 기록하거나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아 성명들은 알 수 없고,

다만 한국인들이 외모도 일본인들과 같고, 성명도 일본식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상당수 한국인이 일본인 포로 취급을 당해 일본인 포로 속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탈출사건이 있기 직전 정밀조사를 해보니 한국인이 80-100명 있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성명은 대체로 '마쓰모도' '야마모도' 등으로 일본식 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특히 다케오 마쯔모도씨는 한국성이 김씨인 것 같고 얼굴이 곰보얼굴이었다고 한다. 수용소에 한국인 포로들의 인적사항은 일본인 대탈출사건의 주모자의 한사람인 아기라 가나자와가 아직도 일본 동경에 살고 있으니 찾아가서 물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라.카우라 일본인 전몰자 묘지에 한국인이 매장된 것은 일본인포로 대탈출사건 당시 한국인이 자기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일본인포로 행세를 하면서 일본인 병사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는 B캠프에 일인들과 같이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과 같이 탈출하다가 몇 사람이 희생되어 매장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숫자는 잘 모른다고 한다.

마.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한국인과 탈출사건 때 희생된 한국인 그리고 일본군포로와 사망자의 자료와 명단 등 자료는 호주 캠베라에 있는 국방성이나 육군본부에 있을 것이고, '잉어처럼 죽어라'는 책을 쓴 해리 고든씨에게도 상당한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노벌씨도 고든을 몇차례 만나 증언해주었다고 한다.

바.조사단이 받은 인상은 노벌씨가 카우라 수용소와 대탈출사건 및 한국인 수용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9. 종합 소견

1)일본 정부는 2차 대전 중 희생된 일본인들을 영웅시하고 그들의 유골과 위령사업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에 대해 미소정책으로 경제, 문화를 통한 재침략을 위해 장기간 앞을 내다보면서 정부 주도하에 민간단체를 앞세워 주도면밀하게 추진하고 있음을 아시아, 태평양국가에 가보면 피부로 느끼게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광복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2)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은밀히 회유책을 써 과거 일본제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철저히 증거를 인멸하고 생존자들에게는 구체적인 언급이나 자료를 제출하지 않도록 이미 선무공작이 완료된 상태이다.

3)호주인들은 경제대국인 일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구체적인 증거와 증언을 회피하고 있다.

11.계속 조사해야 할 사항

1)해리 고든씨가 쓴 '잉어처럼 죽어라' 책을 번역해 탐독하여 호주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던 한국인에 대한 진상조사 파악

2)해리 고든씨가 쓴 '잉어처럼 죽어라'는 책 1판을 구입 사건 관계자들을 파악,

3)해리 고든씨를 만나 카우라 포로수용소에 관한 자료수집과 진상 청취.

4)라이오넬 부어맨씨로부터 보관하고 있는 카우라 포로수용소에 관한 기록과 한국인 15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는 근거문서 사본 입수 및 1944년 8월 5일 포로대탈출사건 때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것과 좀더 수용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 청취.

5)주호주 한국대사관을 통해 호주 정부 국방성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호주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세 수용되어 있었던, 일본인, 한국인 포로들의 명단 입수.

6)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호주 다이윈 지방에 일시 상륙한 연월일과 전황과 이 전투에서 일본군(한국인 징용자 포함) 전사상자와 포로수 조사.

7)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 내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몇군데나 더 있었는지 그곳에 한국인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는지 여부 확인.

8)카우라 일본군 대탈출이란 영화가 호주 전역에 TV방영되었다는데 이 영화가 언제 방영되었으며 제작사명이 무엇이며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조사 확인.

12. 건의사항

1)보사부에서는 외무부를 통해 주호주 한국대사관에 지시하여 호주정부(국방성이나 육군본부)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우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일본인과 한국인의 명단과 카우라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1944. 8. 5일 일본인 포로대탈출 사건 때 일본인 희생자 명단과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여 회시해 주시도록 요망.

2)제2차 세계대전 중 카우라 이외 호주 국내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일본인 또는 한국인 포로들의 명단을 입수하여 회시 요망.

3)우리 정부(외무부, 내무부, 국방부)에서는 전 해외공관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각 전선에 동원된 한국인 강제징병, 징용, 여자정신대에 관한 인원, 성명 등 인적사항, 희생자 인적사항, 유골유무, 잔류 생존자 등을 조사 보도토록 지시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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