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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송이가 4학년이었던 작년 어느 날.
동생과 함께 아파트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작은 꼬마 두 명이 혜송에게 다가왔다. 혜송이가 자기들보다 어려보였는지 두 꼬마악당은 목소리에 잔뜩 힘을 넣은 채 째려보는 듯, 혜송에게 말을 던졌다.
"야! 너 몇 학년이야?"
갑자기 찾아온, 자기보다 확실히 어려보이는 불청객을 쳐다보며 뜸을 들이던 혜송은 짐짓, 표정을 바꿔 다정한 어조로 되물었다.
"음, 너희들은 몇 학년인데?"
"2학년이다, 넌?"
이때 엽기소녀, 갑자기 돌변해 '니네, 오늘 완전히 끝났다'라는 표정으로 냅다 질렀다.
"난 4학년이다…, 이 XXX들아…."
(아니 저렇게 애기 같이 생긴 애가 4학년이라니. 게다가 저런 욕을…) 두 꼬마는 놀란 눈으로 멈칫하며 혜송을 쳐다보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더니 줄행랑쳤다.
두 불청객이 가고 난 후 혜송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동생과 계속 놀았다.
# 에피소드 둘. 학기초 점심시간에 생긴 일
5학년이 된 올해 학기 초, 점심시간.
배식당번 친구가 혜송의 얼굴을 흘끔 보더니 많이 안 먹을 것처럼 보였는지, 적은 양의 밥을 혜송의 식판에 담아줬다.
식판에 담긴 밥의 양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혜송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새로 만난 친구들인데….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배식당번은 자기 동생쯤밖에 안 돼 보이는 혜송을 한번 쳐다보고는 역시나 한 주걱도 되지 않는 양을 혜송에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혜송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 더 참자.
삼일째, 역시 마찬가지.
며칠간 잠자코 있던 엽기소녀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다정스런 표정으로 그렇지만 배에 가볍게 힘을 넣고 배식당번 친구에게 외쳤다.
"야, 나∼ 은.근.히. 많이 처먹거든!!…"
차례를 기다리며 주변에 서 있던 아이들은 혜송의 돌출 행각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고, 어떤 아이는 큰 소리로 웃었고 또 다른 아이들은 수군거렸단다.
당황한 배식당번의 밥주걱이 혜송의 식판을 한두 번 더 오가고 난 뒤 혜송은 비로소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 에피소드 셋. "스님 할아버지, 지금 남녀차별하시는 거에요??"
혜송의 엽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한 사찰에 갔을 때의 일.
소담한 절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던 혜송의 아빠(나의 형님)는 정자에 앉아 석양 무렵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타종소리에 취해 있었다.
소리의 향기에 흠뻑 빠져 눈을 감은 채 잔향을 즐기던 형님은 타종을 마치고 다가온 스님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딸 둘입니다."
"아들 하나 낳으셔야겠네요. 허허허…."
"예?, 하하…."
아빠 옆에서 아빠와 스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송의 눈에 순간 작은 불꽃이 튀었다. 한 두 보 떨어져 서 있던 스님을 쳐다보며 대뜸 혜송 왈.
"할아버지, 지금 남녀차별하시는 거예요?"
"엥…."
"남녀차별하시는 거냐고요. 이래 뵈도 저도 만만치 않다구요!!"
"!!…"
노스님은 순간,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셨다.
혜송아! 늘 당당하게 자라다오
혜송의 '엽기행동'을 가끔 접하며 가족들 사이에서는 '좀 자제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오가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지나친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우려에서다.
멀리서 전해 듣는 혜송이 이야기에 가끔은 당황하기도 하지만, 작은 아빠인 나는 혜송이가 지금의 당당한 모습을 계속 지켜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눈뜨게 될 여전히 남자 중심의 세상 속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가기 위해 그만한 당당함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늘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시는 형님, 형수님의 사랑과 양육 속에서 혜송이가 바르게 자라가고 있고 또 그렇게 자라날 것이라는 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말이다.
주변 어른들 사이에서 혜송은 '똑 부러지고 야무진 아이'라는 말을 주로 듣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혜송은 의외로 착한 아이로 통한단다. 뜻밖의 돌출행동으로 가끔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것만 빼면….
사랑하는 나의 조카 혜송아! 어떤 삶을 살아가든 늘 지금처럼 당당하게 살아가는 혜송이가 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