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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형.
며칠 전 MOM(싱가폴 인력부)에 다녀왔습니다. MOM에는 이번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처음에는 저의 취업비자를 받으러 갔었고, 이번에는 아내와 아이들의 체류비자를 받으러 갔습니다. 싱가폴에 비자 없이 입국하면 3개월까지만 체류가 가능합니다. 이제 가족 모두 비자를 받았으니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년 동안은 여기 싱가폴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MOM에 갔을 때 저처럼 취업비자를 받으려고 온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거기에 온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자니 인종 전시장에 온 것 같았습니다. 인도나 필리핀에서 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였지만, 중동이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도 꽤 눈에 띄었습니다. 싱가폴이 국제도시라는 게 실감나더군요.
사실 MOM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겁을 잔뜩 먹었습니다. 싱가폴에 직장을 구해 이민을 왔다는 건 제가 싱가폴의 이주노동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가 겪는 박대가 어떤 것인지 잘 아시잖아요.
한국사람들이 꺼려하는 온갖 힘든 일은 다 하면서도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는커녕 업신여김과 각종 위험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한국 땅의 이주노동자들.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임금을 체불당하고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제대로 하소연할 만한 곳이 없는 게 한국 땅의 이주노동자들 처지입니다.
이주노동자 입장이 되어 싱가폴 공무원 앞에 서다
그들에게 한국 정부 및 공무원은 어떤 존재일까요?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편의를 제공하고, 제도를 개선하기보다는 백주대낮에 토끼사냥 하듯 이주노동자들을 잡아 가둔 후 한국 땅에서 쫓아내는 모습이 더 익숙하지 않나요?
제가 그 이주노동자의 입장이 되어 싱가폴 공무원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긴장을 했겠어요? 비자 발급하는 과정에서 혹시 트집 잡히지나 않을까 싶어 옷도 제일 좋은 걸로 차려 입고 구두로 제대로 닦고 갔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딴판이었습니다.
MOM에 들어서면 정부기관이라기보다는 은행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번호표를 뽑는 것이거든요. 번호표를 뽑아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전광판에 자기 번호가 뜨면 담당 공무원과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습니다.
서류는 이미 팩스로 제출했기 때문에 여권을 통해 본인 확인만 한 뒤 그린카드(비자를 신청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신분증) 발급을 위한 절차를 알려줍니다. 그린카드 발급 역시 번호표를 뽑은 후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가 수수료를 지불하면 바로 발급됩니다.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되돌아 봐야 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이 마무리됩니다.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약간 허탈하더군요.
나오다가 MOM 건물에서 독특한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KINDERLAND’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아이들을 맡기는 곳이었습니다. 호기심에 들어가서 용도를 물었더니 MOM에 용무가 있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이를 맡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비자발급 과정은 단순해도 기다리는 시간이 길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아 주는 것입니다.
싱가폴 MOM의 성격이 이주노동자를 단속하거나 조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이주노동자의 편의를 위해 행정서비스 하는 곳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이주노동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을 때도 MOM에 신고를 하면 사업주가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사람과 똑같은 대접 받게 해주세요
박 형.
전 이곳 싱가폴의 이주노동자입니다. 싱가폴 회사에 취직이 되어 2년간 체류를 허락 받은 불안정한 신분이지요. 이 나라가, 이웃들이, 회사 동료들이 제가 이주노동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낼 수 있도록 잘 대해 주기 때문에 저 역시 그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지낼 뿐입니다.
한국도 조금씩 달라지겠지요. 이주노동자의 노동력만 착취하고 그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던 산업연수생 제도가 이제 두 달 후면 폐지된다고 합니다. 새로 시행되는 고용허가제가 부디 이주노동자들의 권익과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고용허가제 대행기관으로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이권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부실관리 및 탈법을 저질렀던 단체가 다시 선정될 거라는 우울한 소식이 들리기는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의 노력을 통해 개선이 되리라 믿습니다.
싱가폴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박 형에게 부탁 하나 할게요. 한국에서 한국사람이 하기 꺼려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동안 한국사람과 똑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애써 주세요.
일에 대한 보상도, 각종 사회보장 혜택도, 의료나 교육의 기회 역시 똑같이 제공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싱가폴에서 그렇게 대접받고 있거든요. 박 형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때 그들을 이주노동자라 생각지 말고, 마치 저를 만난다 생각하고 그렇게 대해 주세요. 그게 제 부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