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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공단에 위치한 한국전력.
ⓒ 오마이뉴스 홍성식

열 번 듣느니 한번 보는 게 낫다는데... 이번 방북 길이 꼭 그런 경우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일 서울대 강연에서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사업과 관련 "우리가 북측으로 각기 5km, 10km까지 진출한 것이다, 휴전선이 그만큼 북쪽으로 올라간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지만 '머리'로 들렸다.

하지만 이튿날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따라 개성공단을 방문에선 달랐다. '찌릿'한 게 있다. 2000만평에 달하는 '미래의 개성' 설계모형을 봤을 땐, 가슴이 확 트였다. 개성공단이 평화의 '숨통'이란 말, 맞다. 이곳이 없었다면, 요새같은 분위기에서 어떻게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의 개성 땅을 밟았을까. 새삼 1998년 개성공단의 첫 삽을 뜬 '김대중 선생님'이 다시 보인다.

['찌부둥한' 출발] "그래도 간다"

이번 개성공단 방문은 어렵사리 결정되었다. 당내 반대도 적지 않았다. 추가 핵실험 가능성으로 정세가 가변적인 상황이니 좀더 시기를 두고 보자는 신중론이 있었고, 다른 한측에선 "대선 행보 아니냐"며 견제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에선 '선군정치의 첨병' '핵 포용정책의 전도사' '김정일 위원장의 위문사절단' 등의 표현까지 나왔다. 그래도 김 의장은 '강행'했다.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결단'이다.

오전 7시 국회 본청에서 버스 두 대가 출발했다. 의원들과 기자들이 나눠 탔다. 출발에 앞서 김근태 의장은 이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분단국가이자, 정전협정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곧 밥'입니다."

서울에서 개성공단까지는 60Km. 승용차로 1시간 거리다. 160Km 거리에 있는 평양보다 가깝다. 버스는 자유로를 따라 달리다,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를 지나 남측 통관사무소에 도착했다. 방문증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검색대에 소지품이 통과되면 수속은 끝난다. 남측 직원은 "안녕히 다녀오시라" 인사한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제 비무장지대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모든 방문 차량은 번호판을 가린다. 개성공단 입주 업체의 차량에는 회사 이름이 적혀 있다. 또 빨간색 삼각 깃발도 단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기 위한 표식이다. 비무장지대에선 군 차량이 앞장서 버스를 안내한다. 군사분계선에 이르자 남측 군이, 북측 군에게 일행을 인계한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4차선 도로, 8차선으로 확장될 예정이다. 이 도로를 따라 개성으로 송출될 한국전력의 송전탑이 줄지어 나타난다. 남한의 자본이 관통하고 있다. 멀리 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안개 낀 개성 길] "그러나 평탄하게 지나다"

▲ 지난해 5월 26일 개성공단 신원 공장에서 북한 여성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100만평 부지에서 1단계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시범단지에 도착하니, 김동근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장이 나와 환대한다. 그는 "가족 대표로 감사드린다, '강행'이란 표현까지 나오는 상황인데…"라며 남측 분위기를 의식했다. 그러면서도 "개성공단은 뚜벅뚜벅 전진하고 있다"며 "포용정책을 뛰어넘어 북남의 호혜적 사업"임을 강조했다. 김 의장은 방명록에 "개성은 평화이고 희망입니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북측에선 강용철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과 한웅희 민화협 중앙위원 등 10여명이 나왔다. 강 부총국장은 "지척이다, 개성이 서울에서 더 가깝다"는 말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서울과 개성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되려 '평화'는 개성에서 느껴졌다. 동행한 천정배 의원은 "국회 출발하면서는 약간은 긴장이 되었다"며 "그러나 오는 길이 너무나 평탄했다, 개성공단은 평화지대"라고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김근태 의장도 "사실 내가 찌뿌둥했다, 출발 시간이 일러서기도 하지만 국내외 사정을 볼 때 심적 부담이 컸던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버스 타면서 마음이 가라앉았고 공장을 돌아보면서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보고 느낀 것을 남측 국민에게 보고 드리겠다"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점심 식사 전까지 일행은 바쁘게 현지 공장들을 돌아봤다. 의류업체인 신원에벤에셀, 시계를 제조하는 로만손, 신발을 만드는 삼덕스타필드, 세 곳을 방문했다. '우리는 세계에서 최고의 생산능률을 올린다' '우리는 세계에서 최고의 품질을 만든다' 표어가 붙어 있고, 노동자들은 작업에 몰입했다. 공장마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으로~'으로 시작되는 <찔레꽃>을 비롯해 <군밤타령> <신고산타령> <금강산타령> 등 북한 민요가 흔했다.

개성공단에는 현재 북측 9317명, 남측 790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임금은 월 50~75달러 수준이란다. 이곳엔 '유무상통'이란 말이 있다. "있고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하자"는 뜻이다. 남한이 유리한 기술력, 자본, 마켓팅을 대고 북한의 풍부한 노동력, 지하자원을 서로 교류하자는 것. 공단측에선 1단계 사업(100만평)이 완료되면 북측 노동자 7만여명이 고용될 것이라 전망했다.

[환대하는 사람들] "개성공단은 생물이다"

이날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가 출범한지 2년째, 기념식이 열렸다. 김동근 위원장은 개성공단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개성공단은 남북경제공동체 모델이다. 남측기업은 북측의 노동력으로 경쟁력 갖추고 우리 중소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살아갈 대안임을 증명하고 있다. 둘째, 1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체제 이념을 넘어 남북민족통합의 표준을 만드는 곳이다. 민족 호혜, 평화의 연습장으로 통일비용도 줄일 수 있다."

이어 김근태 의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사업은 한반도 평화를 떠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이다. 국제 금융시장이 금강산과 개성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 두 길이 막히면 국제 금융시장은 '코리아 리스크'라는 카드를 쓸지 모른다. 북측은 비핵화 약속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북측을 비롯한 모든 관계 당사자들이 관계를 악화시킬 추가적인 조치는 하지 말아야 한다. 2차 핵실험은 절대 없어야 한다."

'2차 핵실험' 언급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북측의 항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에 조율된 내용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우상호 대변인은 전했다. 개성공단 사업의 지속 의지만큼이나 북핵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강병철 부총국장은 개성공단의 성과에 대해 "북, 남 관계자들이 쌓아온 결실"이라고 공동 노력을 강조한 뒤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 밑에 서로 지혜와 힘을 합쳐 나간다면 세계적인 공업지구로 건설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업체 사장은 "개성공단은 생물과 같다"고 말했다. 한달 한달이 다르단다. 그래서 중단할 수 없다. 참석자들은 "개성공단은 간다! 간다!!"고 합창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남측 노동자 가족 25명도 함께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한 관계자는 "핵실험 이후 북이 오히려 협조적으로 나온다"며 "가족 방문도 성사가 안됐는데 이번엔 성사되었다"고 귀띔했다. 또 최근엔 모업체에 230명의 북측 실습생들이 대거 파견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이 원하는 건 핵이 아니라 대화"라고 확신했던가.

개성공단 사람들은 평온했다. 전날엔 남측 노동자들이 기업체별로 축구대회를 했다. 한국전력이 우승했단다. 북측 노동자들은 응원했다. 문제는 흘러들어오는 외지의 소식이었다. 김기만 로만손 회장은 "여기 업체들은 5, 10년을 내다보고 투자했다, 그런데 당장 철수한다 만다하는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전혀 동요가 없다"며 "입주 기업들은 정부를 믿고 기업 활동을 한다"고 지원을 당부했다.

한 북측 관계자는 기자에게 다가와 "개성공단 어찌 될 것 같은가, 미국에서 이거 막으러 온 것 아닌가"라며 남측 분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면서 "개성공단 사업은 통일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긴장 감돈 서울행] "북이 다시 핵실험 하면 어쩌나"

▲ 개성공단에 있는 로만손 협동화공장
ⓒ 변종만

짧은 시간 여러 곳을 돌았다. 12시가 넘었다. 다들 시장기가 돌 때다. 김근태 의장의 입에서도 "배가 고프다"는 말이 나왔다. 공사현장에 가건물로 지어진 북한식당('봉동관')으로 향했다. 북측 남측 관계자 70여명이 함께 한 오찬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안내원 선생'들이 음식을 나르고 노래를 불렀다. 술도 들쭉술과 령정주, 대동강 흑맥주가 올랐다. 한 북측 인사의 '죽 내줍시다(다 마시기)'라는 선창에 따라 술도 몇 순배 돌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여성 안내원들이 나와 노래를 불렀다. 남측 인사들도 불려나갔다. 원혜영 의원이 이끌려나가 함께 부채춤을 추는 양 하더니, 손사래를 치며 거북해하던 김근태 의장도 이미경 의원과 함께 나가 강강수월래 동작을 취하며 흥을 나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서 분위기는 굳었다. "북핵 사태라는 엄중한 상황에 집권당 의원들이 북에 가 '춤판'을 벌였다"는 시선을 의식한 탓이다. 나중에 이미경 의원은 "북에서 온 여성들이 남측 기업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데 표정이 환하고 밝아서 마음에 와 닿았다"며 "딸같은 여성들과 어울리는 게 자연스러웠다"고 이해를 구했다.

식사시간은 한 시간여 만에 끝났다. 오후 2시 30분까지 남측 통관소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껏 고양되었던 김 의장의 표정도 어두웠다. 행여 이날 개성공단을 방문한 '가치'가 역전되는 상황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김 의장은 행사를 모두 끝낸 뒤 기자간담회에서 "열린우리당을 대표해서 온 것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개인'이 결단해서 왔다"고 말해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어 "2차 핵실험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며 당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방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의식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통해 성장한 금강산·개성공단 사업의 사수를 외쳐온 김근태 의장의 입지는 이래저래 좁았다. 하지만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을까? 김 의장 일행이 서울에 도착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탕자쉬안 국무위원에게 '추가 핵실험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돌아오던 길, 북측 통관소 여성 안내원의 인사말 "성과 있었습네까?"라는 말이 아전인수격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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