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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헤드윅> 포스터
ⓒ 백두대간
2005년 국내에서 처음 공연된 이래 많은 반향을 일으키며 스타들을 탄생시킨 뮤지컬 <헤드윅>의 3기 공연이 지난 14일 대학로 SH 클럽에서 시작됐다.

<헤드윅>은 이전에 영화로만 보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오만석, 조승우, 송용진, 김다현의 1기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하여 그 아쉬움이 남던 차에 다행히도 늦게나마 이날 밤 10시부터 시작하는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헤드윅역에는 송용진, 이츠학역에는 새로 합류한 안유진이 출연해 사회적 소수이자 주변인인 트랜스젠더 록가수의 이야기를 2시간여 동안 절절하게 표현했다.

공연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열광 그 자체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앞의 자리를 모두 점령(?)한 송용진 팬클럽이나 수십번씩 공연을 보았다는 '헤드헤즈'라는 헤드윅 마니아들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연장에는 헤드윅을 보기 위해 온 서툰 한국말을 쓰는 일본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그린 <헤드윅>이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 관중들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돌이켜 보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나 게이문화가 마냥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이미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의 등장과 입소문을 타고 기록적인 흥행작이 된 <왕의 남자>의 전철만 놓고 본다면 이 한국사회가 성적 소수자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착각이라는 사실을 유행했던 작품의 면면을 잘 살펴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하리수를 트랜스젠더로 보기보다는 섹시한 분위기에서 풍기는 특이한 상품성과 성적 코드로 그를 이해했으며 영화 왕의 남자가 한국인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는 게이로서의 공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영화 속 분위기 도처에서 수없이 넘실대는 권력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풍자 그리고 요소요소 양념처럼 나오는 전통해학의 재미때문이었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즉 이들이 성공한 이유는 이들이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비록 게이나 트랜스젠더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정도쯤은 용인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 매력을 지닌 이야기를 풀어 내놓았다. 그런 이유로 하리수나 <왕의 남자>는 대중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뮤지컬이나 영화 <헤드윅>도 이러한 연장선일까?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렇다'이다. 뮤지컬보다 먼저 국내에 소개된 영화 <헤드윅> 개봉 당시 '퀴어영화'라는 인식 때문에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뮤지컬 <헤드윅>이 흥행을 하게 된 원인은 뭘까? 첫 번째 코드는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흥미로운 정치권력의 메커니즘이다.

사실 <헤드윅>을 퀴어작품이라고 보기엔 난감한 면이 많다. 오히려 이 작품은 매우 미국 냄새가 심한 작품인 동시에 철저히 미국문화를 비판하는 양면성을 지닌 매우 정치적 성향의 작품이다.

우선 주인공 헤드윅 스스로가 실패한 성전환수술을 받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적 소수자가 된 원인이 보통 트랜스젠더처럼 성정체성에 대한 내면적 고민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미국 시민권으로 상징하는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고 보면 자유를 찾아 베를린장벽을 넘던 예전 동독사람들처럼 극히 자연스런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 나오는 구미베어 젤리 또한 또하나의 권력이다. 달콤한 미국의 환상으로 이끄는 권력의 상징, 미국 록가수(그들도 엄밀히 말하면 오리지널 미국사람이 아니지만)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소년 한센이 구미베어젤리를 먹는다는 것은 매력적이고 달콤하기까지 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뿐인가? '슈가대디'라는 노래 속 베르사체 블루진이나 밀라노와 로마의 디스코댄싱제트족, 락앤롤, 위스키, 프랑스제 담배, 고속제트 모토바이크, 워터피크 물마사지, 퀴진아트 조리기 등등 정신없이 나열된 각종 문구들이야말로 평소 그가 동경해마지 않았던, 가진 자가 의미하는 권력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달콤한 권력을 갖기 위해 자신의 성을 과감히 포기한 한센을 절망에 빠트린 것은 그토록 힘들게 빠져나온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뉴스만큼의 좌절감을 안겨준 실패한 성전환수술의 후유증과 허름한 트레일러 주택에서 버려져 당장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처참한 성적 소수자의 삶이었다.

영원한 흥행코드, 권력과 사랑

권력에의 달콤한 환상이 처절하게 깨지는 순간, 그의 시선은 구미베어처럼 달콤하기만 했던 미국의 환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뀐다. 그 냉소와 풍자는 'wig in a box' 노래에서 잘 나타나있다.

노래 속에 나오는 미스 미드웨스트 체크아웃 퀸이나 1963년 미스 비하이브, 도로시 해밀, 미니 시리즈 미녀 삼총사의 주인공중 한명인 파라파셋이 의미하는 것은 미국인들이 동경하는 전형적인 금발의 미녀 이미지이다.

이들을 통해 만들어진 부풀려진 미국 대중문화의 화려한 허상을 노래 속에서 마음껏 비웃는다. 자신도 이들처럼 금발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고 화려한 꿈을 꾸지만 꿈에서 깨면 허상 뿐인 이미지라는 사실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에 대해 결코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를 해가며 생존을 위한 나름대로의 처절한 투쟁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뮤지컬 <헤드윅>이 영화 <헤드윅>과 다른 점이라면 성적 소수자인 이들 사이에도 어김없이 존재하는 얽히고 설킨 그들만의 권력구조에 대한 감정묘사이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었던 헤드윅과 이츠학, 밴드 앵그리인치와의 관계가 분명해지면서 구미베어 젤리라는 권력의 단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헤드윅은 자신이 똑같이 당했던 것처럼 미국시민권이라는 미끼를 통해 이츠학에게 남성성을 강요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최대한 권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그 권력이란 것도 대단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처절한 몸부림으로 느껴지는 것또한 <헤드윅>이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또하나의 코드는 뭐니뭐니해도 사랑이다. 자신의 곡을 도용해 앨범을 발매하여 유명가수로 성공한 토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들만의 공연을 하는 행위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의도된 공연 속에서도 헤드윅은 줄기차게 사랑을 외친다. 다시 찾은 반쪽이라 믿었던 토미에 대한 다양한 애증의 감정이 미움이 아닌 사랑이었다고 쉴새없이 소란스럽게 떠벌리는 헤드윅의 말이 결국에는 벗어 던진 가발과 함께 자기애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면서 여러 종류의 사랑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헤드윅이 주는 매력이다.

이처럼 <헤드윅>은 영화이든 뮤지컬이든 한결같이 권력에 대한 냉소와 상처받은 불안한 사랑의 치유과정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작품이다. 부분 부분 더하고 덜한 것은 있지만 뮤지컬이나 영화 모두 헤드윅이란 작품 자체의 개성과 매력을 충실히 살린 편이라고 본다.

다만 이번 3기 헤드윅 뮤지컬 공연을 보고나니 영화로 보아왔던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과 유사하면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건 공연하는 배우 몫이나 번역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부족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공연 당시 송용진 스스로도 부르면서 너무 신나했던 'wig in a box'만 해도 그렇다. 물론 송용진은 송용진 나름의 개성대로 이 노래를 불렀고 존 카메론 미첼도 미첼식의 개성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사실이다. 다른 헤드윅을 했던 오만석도 그랬고 조승우도 그랬다. 그런데 끝없는 나락에 빠진 절망감에서 점점 벗어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이 노래의 독특한 점을 잘 살린 이는 뭐니뭐니해도 영화 속의 존 카메론 미첼인 듯하다.

글쎄 아마도 사회를 향해 큰 소리가 아닌 작은 소리로 냉소하고 빈정대는 듯한 미첼의 분위기가 그런 느낌을 주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의 뮤지컬 헤드윅은 주제의 접근방식에서 영화상의 빈정대기보다는 오히려 투덜대는 쪽에 더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빈정대든지 투덜대든지 간에 상처투성이 동독 출신 트랜스젠더 록가수의 이야기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나의 이야기가 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약간은 냉소적인 시선을 가지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끝없이 사랑을 갈망하는 비뚤어진 우리의 이야기, 헤드윅의 가짜가슴이었던 토마토는 이미 터졌고 그는 모든 것을 벗은 채 무대 위 비상문으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이미 그는 트랜스 젠더가 아닌 상처받기 쉬운 여리고 여린 우리같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뮤지컬 헤드윅 3기 공연은 10월 14일~11월 19일까지 대학로 S.H 클럽에서, 영화는10월 29일부터 25일까지 시네큐브에서 1일 3회 상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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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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