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분간 지속한 대치 상태가 끝나고 시위대는 휴식을 취했다. 이날 경찰과 시위대는 서로 몸싸움을 하기도 하였지만 물을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이지요. 내 부모님도 광양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어요. 하지만 내 어머니가 와도 나는 이곳에서 막아야 합니다."
"벼농사가 경쟁력이 없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경찰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손으로 모를 심으며 자랐다는 그 경찰은 "내년 2월에 보직 변경이 되어 시위를 막으러 현장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며 빨리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농민들의 삶은 술을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들판에서 일을 할 때도 술이 필요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시위를 할 때도 술이 필요하다. 왜 그런 걸일까?
들판에서 일을 할 때는 힘들어서 술을 마셔야 하고, 시위를 할 때는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때는 감귤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도 불렀는데, 이제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귤을 대량으로 수입하지는 않지만, 귤의 대체 식품이라 할 수 있는 오렌지 등이 대규모로 수입되면서 귤은 상대적으로 소비가 줄어들었고, 이로 인하여 귤 가격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귤을 제외한다 하여도 안심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원정 시위대와 제주도 농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한미FTA' 상여와 제주의 조랑말, 농악대를 선두로 제주국제컨벤션센터를 향해 행진을 하였다. 경찰은 이 과정에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로 통제를 너무나 잘하여서 시위대가 아닌 일반인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과하는 데는 무려 15분이 넘게 걸렸다.
주름살 가득한 농민들이 손에 깃대와 각종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아스팔트를 걷는 모습을 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뭔가 뭉클한 것이 용솟음쳤고, 눈에는 눈물이 나올 듯하였다.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외국에 나가 힘들게 승리했을 때의 그 감정,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누가 농사밖에 모르는 농민들을 거리로 내몰았는가? 누가 저들을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투사와 같은 열정을 갖게 하였는가!
협상이 열리는 제주 하얏트 호텔을 멀리 바라보며 농민들은 한숨만 짓고 있었다. 갈 수 없는 그 곳을 바라보며 멀리서 볼 수 있게 '반대 한미FTA'라고 적힌 대형 풍선을 띄우고, '안돼 FTA'라고 적힌 연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은 무심하게도 협상장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불고 있었다.
경찰들이 보기엔 농민들이 커다란 파도로 보였던 것일까? 파도를 막기 위하여 만든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삼발이)로 도로를 막고, 컨테이너를 밀어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길게 쌓아 두었다.
뒤에는 소방차와 살수차 등이 물을 뿌리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경찰들도 개미떼처럼 몰려 있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산으로, 바다로 향했다. 길을 막으면 다른 길을 만들어서 진군을 했다.
방파제로 향하자 경찰들은 오히려 안심했다. 바다여서 포기하고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경찰들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돌아올 줄 알았던 농민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약 30여m가 됨직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 것이다. 처음에 뛰어든 농민이 입에 밧줄을 물고 건너갔다. 그리고 콘크리트 구조물(삼발이)에 묶었다. 다음 농민들은 그 밧줄을 잡고 바다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