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이 마을은 지리산의 최정상인 천왕봉을 최단거리로 오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 남명의 유적지나 단속사지 등 지리산 쪽을 탐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남사마을을 외면한 채 그냥 먼발치로만 스치고 지나가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경남도가 관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민속마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마을인 것이다. 호사스런 안내판도 없고 탐방객을 유인하는 가게나 안내인도 없다.
마을회관 앞에 설치된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은 항상 한적하기만 한데 동네에서 만나는 노인네들은 '한옥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거니'하고 쳐다만 볼뿐이다. 이 마을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고자하는 탐방객이라면 마을회관에 들러 안내를 요청하면 되는데, 때로는 안내인이 자리를 비우기도 하기 때문에 산청군청에 미리 연락을 취하고 가는 것이 제대로 이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양옆으로 높이 서 있는 토담길을 들어서면 정겹다기보다도 어쩌면 위압감마저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특이하게도 다른 전통마을과 달리 여러 성씨들로 이루어진 집성촌이라 서로 마을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담장을 높이게 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남도 지정문화재 117호인 경주 최씨의 고가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타나는데 85년 전에 지어진 이 집은 엊그제 신축한 새집처럼 보인다. 몇 년 전에 산청군청에서 군비를 들여 기와를 새로 갈아준 외에는 나무 하나 흙 한줌을 새로 고친 일이 없다고 한다.
상량문을 올려다보면 신유년(申酉年)이라고 쓰여있는데 이는 일제치하인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2년 후에 신축된 집이라는 뜻인데, 대대적으로 항일 열사들을 탄압하던 시기에 이 집이 지어졌으니 자못 당시의 건축주가 어떤 신분을 가졌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집을 지을 때 지리산에서 나무를 벌목하여 소금물에 찐 후 3년간 건조시켜 치목을 했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느 집하고는 달리 기둥이 갈라졌다거나 장부사이가(이음부위) 틈이 벌어졌다든가 하는 목조의 단점이 발견되지 않음은 이 집이 가진 최대 장점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사랑방의 덧문을 찍은 것인데 여름을 나기 위하여 모기장을 덧댄 것이 보인다. 모기장 안쪽으로 또 하나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을 열면 겨울을 나기 위한 겨울 방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방 하나가 겨울에는 방이 둘로 나누어져 구들방과 냉방으로(이 냉방은 구들이 없이 청마루로 짜여져 누마루와 연결된다) 되고, 더운 하절기에는 이 둘이 합쳐져서 시원한 여름 방이 되는 것이다.
사랑채 뒤에 있는 안채의 모습이다. 사랑채와 다른 부속건물들과 더불어 요즘에 짓는 한옥과는 달리 기둥머리에 주두나 소로도 없고 부연을 덧대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옛 조선시대의 건축법식이 완전히 무시된 채로 굵은 부재를 쓴 우람한 건물이다.
마루의 양옆으로 나무로 짠 선반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주로 밥상이나 주안상 등 각종의 상(床)을 올려놓기 위한 공간이다. 그 집의 식구와 하인을 비롯한 식솔들과 방문객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가는 바로 이 선반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인의 품성과 그 집안의 인정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되는 셈이다.
이 집을 들어설 때보다는 나갈 때 눈에 띄는 장면이다. 85년이 지난 후의 목각인데 그 나뭇결하며 발톱이나 꼬리가 요 며칠 전에 조각한 듯이 생생한 모습이다. 최근에 설치한 철물로 된 시건 장치와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고 그 용도 또한 같은 것이어서 옛사람과 지금사람의 마음속이 읽혀지는 듯한 광경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가는 길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IC(지리산IC)에서, 또는 진주-함양간 3번 국도 => 단성면 소재지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중산리 방향, 즉 지리산 방향으로 약 10분 거리
주변의 볼거리 - 단속사지, 남명 조식의 유적지, 대원사 등 많은 볼거리가 30분 이내의 시간대에 있고 지리산 천왕봉을 최단거리로 등산할 수 있는 중산리나 지리산 양수발전소도 지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