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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작년에 한계령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도 큰 애가 징징거려서 남편이 업고 가고 있고, 작은 애는 이것저것 호기심을 보이며 씩씩하게 잘 가고 있다.
이 사진은 작년에 한계령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도 큰 애가 징징거려서 남편이 업고 가고 있고, 작은 애는 이것저것 호기심을 보이며 씩씩하게 잘 가고 있다. ⓒ 김은주
매표소에서 한계령 갈림길 삼거리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렸는데 거기까지 아이들은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잘 올라왔다. 이 곳까지는 경사가 꽤 급한 편이었지만 여기서부터 대청봉까지는 대체로 완만하다고 남편이 말했다. 완만한 길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거리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새벽 6시에 산을 타기 시작했는데 시간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큰 애가 자기의 배꼽시계가 밥 달라고 아우성이라고 했다.

등산로에서 가까운, 소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전날 열심히 준비해온 아침밥을 먹고,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물로 커피도 타 마시고, 아이들에게는 핫초코를 타주었다. 산에서 먹는 아침은 정말 꿀맛이었다.

밥을 먹고 나니 온 몸에 힘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이런 컨디션이라면 하루 종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길도 좋다고 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대청봉 별 거 아닌 거 아니야,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했던 길 하고는 좀 달랐다. 오솔길을 걷는 것처럼 흙의 감촉이 부드럽게 발에 감기는 그런 길로만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길도 있지만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하고 바위도 발에 심심찮게 걸리는 좀 까다로운 길이었다. 경사가 처음 두 시간 올라올 때만큼 급하지는 않지만 마음 놓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분명 아니었다. 간신히 올라왔다 싶으면 또 내려가야 하고 또 올라오고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걸었다.

조용히 잘 걷던 큰 애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4시간 정도 지났을 때부터 큰 애는 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되면서 짜증을 부렸다. 선물 받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려가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힘들어 죽겠는데 온 길만큼 더 가야 대청봉인가 뭔가가 나온다고 그러고, 또 되돌아올 것까지 생각하니 도대체가 답이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계속 되돌아가자고 졸랐다.

우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어디고 얼마큼 가야 목적지에 닿을지도 모르고, 그냥 어른들을 따라 나섰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어지니까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건 당연했다. 큰 애가 느낄 답답함과 지겨움, 힘듦, 그리고 언제까지고 이 힘든 노동을 계속해야 할 것 같은 절망감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큰 애를 윽박질러서 무조건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달콤한 말로 위로하며 비위를 살살 맞출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떼가 늘어져서 감당이 안될 만큼 어리광이 심한 애였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서 묵묵하게 가던 길을 걷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우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큰 애가 마침내 우리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아동 학대야, 어린 애를 이렇게 계속 걷게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난 아동학대 신고센터 전화번호도 알고 있어."

그러면서 무슨 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방어 전략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최후의 통첩인 양 자기 혼자 내려가겠다며 우리가 올라가는데도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선택은 무반응뿐이었다. '올라오든가 말든가' 계속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서 뒤돌아봤는데 큰 애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았다. 거기서 한참 기다리고 있으려니 큰 애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 돼 보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니까 그냥 올라가는 수박에는 없었다.

가는 수밖에는 없다

큰 애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떼를 쓰며 멈춰 서고 따라오고를 반복하다가 마음을 바꾼 계기를 만났다. 전날은 마셨었는데 나중에 그게 해골물이라는 걸 알고는 역겨움에 시달리다 한 자리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 스님에 관한 일화처럼, 죽어도 못가겠다고 버티던 큰 애의 마음이 '갈 수밖에는 없다'는 마음으로 일순간에 바뀌었다.

설악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잠시 쉬며 물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있을 때 떼를 쓰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큰 애가 딱해 보였는지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주었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게 더 멀어. 차라리 올라가는 게 쉽지. 그리고 내려올 때는 오색 코스로 내려오면 금방 내려올 수 있으니까 암말 말고 그냥 올라가라, 아가야."

마침내 큰 애는 한 가지 선택밖에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내려가면 되는데 왜 올라가느냐고 떼를 쓰며 내려가는 것과 올라가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하면서 괴로워하던 큰 애는 아주머니의 말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은 올라가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큰 애가 투정을 안 부리니 등산이 반은 덜 힘든 것 같았고, 큰 애도 마음을 바꾸니까 훨씬 쉬어졌는지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서 걸었다. 떼를 쓰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게 부끄러운지 역시 물도 안 마시겠다, 사진도 안 찍겠다, 했지만 큰 애가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기 몫의 고난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음을 역력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한계령으로 대청봉에 이르는 길은 정말 멀고 지루하긴 하지만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코스였다. 날씨도 화창해서 곱게 물든 단풍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있었다. 저 멀리 공룡능선의 기묘한 바위형상도 볼 수 있었고, 첩첩이 쌓인 설악산 깊은 계곡도 다 감상할 수 있어 힘든 와중에도 '야'하고 절로 탄성이 나왔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정말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산이었다.

7시간을 걸어 드디어 대청봉 고지가 한눈에 보이는 중청봉 대피소에 이르렀다. 등산객이 많아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거기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대피소에 바람막이가 준비돼 있어 불을 피울 수가 있었다. 라면을 끓여서 아침에 남은 밥과 함께 먹었다.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라면은 라면 봉지에 담아서 먹는 라면 맛이 끝내준다고 해서 그렇게 해봤는데 정말 맛이었다.

마침내 대청봉 등반에 성공

마침내 대청봉 등반에 성공. 우리는 드디어 '해발 1708미터 대청봉'이라는 글씨가 박힌 표지석 앞에 서게 됐다. 오합지졸 우리 가족이 이 거사를 성공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편과 나, 올라오는 내내 떼를 쓰며 우리를 괴롭혔던 큰 애, 대체로 잘 올라왔던 작은 애, 모두 이 순간만큼은 한 마음이 돼 서로를 자랑스러워하고 기쁨에 들떠서 서로를 추켜세우기 바빴다.

"너희들 정말 대단한 아이들이야,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이 절로 나왔고, 남편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날의 기분 같아서는 아이들이 공부를 좀 못해도 하나도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아이들이 자랑스럽고 뭔가 큰일을 해낸 감동에 우리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정말 대청봉은 특별한 곳이었다. 우리 가족이 대청봉에 올랐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서 누구라도 붙들고 자랑하고 싶었다. 이제 어떤 산이든 오를 준비가 돼 있고, 내려가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정말 자신감 완전 충전 상태였다. 등산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인 것 같다. 뭔가를 해냈다는 그런 자신감을 심어주고, 의지를 키워주고, 공부 까짓것 좀 못하면 어때, 하는 대범함을 갖게 하는 그야말로 호연지기를 키워주는 게 등산의 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휴일에 가족과 함게 한계령으로 해서 대청봉에 올랐다가 오색코스로 내려왔습니다. 가족을 더 이해하게 된 의미 있는 등산이었습니다. 군에 다녀온 사람이 한동안 군대 얘기만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대단한 등반이었기에 할 말이 많고, 그래서 3회에 걸쳐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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