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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그리고 그의 동영상 강의도 듣게 된 계기는 아주 엉뚱하다. '진중권'이라는 사람이 지닌 가벼움, 그러면서도 그 가벼움이 결코 경박함이나 천박함으로 인식되지 않는 그만의 정신 세계, 그것이 궁금해서이다.

진중권에게서 그 비법을 배워,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 쓸데없고, 알 길 없는 무거움을 더 나이 들기 전에 벗어 던지고 싶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내 생각은 그가 한국사회의 유교적 보수주의 바깥에서 자유롭고 가볍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설픈 태도를 지닌 독서를 단번에 박살내어 버리는 것이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이기도 하다. 그가 지닌 가벼움이 오로지 삶을 가볍게 하려는 방법론만일 것이라는 오해를 했기 때문에 나는 책장을 덮을 때쯤 또다시 그에 대한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열등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인 것 같다. 그가 보여주는 가벼움이 결코 삶의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목표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가 발터 벤야민을 소개하면서 "아우라(aura)의 붕괴는 긍정적"이라고 말한다든지, 현대의 산만한 정신 세계를 지닌 영화 관객들의 모습을 진보적인 대중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벤야민을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이제껏 나는 벤야민이 '아우라(aura)'를 긍정하는 것으로 알았고, 상식적으로 산만한 정신을 지닌 영화 관객은 천박한 것이지 진보적인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부분에서도 그는 내게 신선한 깨달음을 주었다. 대학 시절 하이데거를 좋아하는 척 <존재와 시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도, 막상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지적 허영심을 십 여 년 지나도록 혼자 부끄러워만 했는데, 그의 이 책을 읽음으로써 부끄러움을 많이 불식시킬 수 있었다.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대지'와 '세계', '현존재', '도구 존재' 등 그렇게 어렵던 말들이 이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마 그의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특히 미셸 푸코가 '자기를 알라'라는 명제보다도 '자기를 배려하라'라는 명제가 고대 그리스 시대 더 상위의 명제였다는 점을 밝히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자기 테크놀로지를 현대인에게서 부활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대목에서 미셸 푸코에 대한 가장 큰 오해를 걷어내게 되었다.

미셸 푸코나 쟈크 데리다나 근대 사회에 이르기까지의 주체 중심 철학 부정 작업만을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미셸 푸코가 말년에 미학적 윤리학을 새로이 건설하려 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남다른 감명이 되었다.

무엇보다 현대 미학을 시뮬라크르와 숭고라는 두 개념으로 포괄, 관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깊이 있게 공부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책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미국에서 실재의 모든 사라짐이 사막의 원시적 숭고함을 남기듯이, 시뮬라크르의 미학은 그 극한에서 역설적으로 숭고의 미학에 합류한다" 이 문장은 보드리야르를 해설하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지만 동시에 책의 마지막 부분이므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물론 그의 책에서도 몇몇 단점이 엿보이기도 한다. 현대미학에 대해 소개하는 글인데도, 지나치게 진중권식 주관적 독서에 기대어 서술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점이면서도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객관적인 중립성을 지키면서 맛없는(?) 글쓰기만을 했다면 내가 받았을 감명과 깨달음은 많이 감소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또 그의 책은 현대미학자들을 지나치게 발터 벤야민의 아류로 취급하지 않나 하는 인상을 가지게도 한다. 발터 벤야민의 아류로 만들기 위해 여타의 미학자들의 이론 중 벤야민의 이론에 맥이 닿는 것들만 견강부회했다면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 점은 내가 더 공부를 해야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을 하고 싶다. 그는 '숭고'와 '미', '엠블렘'과 '알레고리', '상징' 등 용어를 자유자재로 쓰지만, 대중적 독자는 이런 개념 용어의 의미가 어렵기만 하다.(사실 나도 그랬다.) 이 책이 지닌 그 훌륭한 가치가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이런 점이 보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책장 덮는 순간까지 내내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까치(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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