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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최정은의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 휴머니스트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 늑대, 그는 돼지와 소가 책을 읽고 있는 동물농장을 습격한다. 그런데 웬걸, 이 농장의 동물들은 늑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꺼져!"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들이 겁없이 '꺼져'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농장은 교양 있는 동물들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쪽(?)을 판 촌 늑대는 그 길로 학교에 가서 ABC 공부를 하고 다시 온다. 하지만 또 쫓겨난다. 책을 더듬거리며 겨우 읽었다는 이유다.

늑대는 이번엔 도서관으로 간다. 거기서 열심히 책읽기를 한다. 그리고 다시 농장으로 간다. 그러나 아직도 읽기 스타일(?)이 형편없으며 독창성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웬만하면 늑대 성질에 더러워서 포기할 텐데, 꼴에 시골출신이지만 자존심은 있는 늑대인지라 또 도전한다.

이번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털어 서점에서 신간을 사서 밤낮으로 읽는다. 그리고 다시 농장으로 간다. 어떻게 되었을까?

또 있다. 이번엔 귀족(?) 늑대이야기다. 늑대 루카스는 집을 나와 독립을 한다. 그에게는 아빠가 적어준 먹잇감 목록이 있다. 하지만 루카스는 먹잇감을 마주칠 때마다 연민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잡아먹지를 못한다.

급기야는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에 이른 루카스, 그런데 그의 앞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라는 괴물이 나타난다. 이런! 루카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들은 프랑스 그림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저자(최정은)는 이 어린이 동화들 속에서 매우 의미 있는 단어를 끄집어 올린다. '트릭스터(trickster)'와 '데코룸(decorum)'이라는 단어다. 트릭스터는 '속이는 자', '트릭을 쓰는 자', 또는 '기쁨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데코룸은 트릭스터와는 정반대의 뉘앙스인 '적절함', 즉 규범이나 규칙을 의미한다.

아니 이런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단어를 어떻게 그림동화 속에서 낚았을까? 저자에게 트릭스터는 '규범'을, '규칙'을 어기는 자이다. 그것은 데코룸적인 공동체의 규범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이자, 어느 가치에도 편입되지 않는 경계선적인 인물이다.

고향을 떠난 시골 늑대, 그는 동물농장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털어 책을 샀다. 이게 쉬운 일인가? '늑대는 늑대다워야 한다'는 늑대 고유의 데코룸을 깼다.

늑대가 먹잇감을 포기하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꿈꾸었다는 것, 그 자체로 시골늑대는 이미 트릭스터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만약 시골늑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투자하는 이 도박에 실패했다면, 그 늑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폐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홧김에 동물농장의 동물들을 다 잡아먹었을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시골늑대의 '신간 서적'에 올인은 무모한 도박이자, '한방'에 인생을 거는 도박꾼들과 다르지 않은 어리석은 짓이다. 귀족 늑대 루카스도 마찬가지다. 늑대가 늑대로서의 데코룸적인 삶을 거부하고 다른(?) 늑대가 되려고 했다는 점에서 루카스도 무모한 도박에 인생을 건 것이다.

그는 아무것이나 먹는 늑대이기를 거부하고 먹기 전에 항상 성찰하고 진정으로 먹어야 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다른 늑대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무모하다는 면에서는 도박과 다름없지만 그들이 추구한 것은 운명적이 삶을 거부하고 다른 어떤 의미 있는 것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데코룸에 안주하려는 도박과는 차원이 다른 한방이다.

그래서 저자는 트릭스터적인 삶을 사는 존재는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 경계선적 인물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어느 쪽에도 들지 않기에 그들은 양쪽을 다 배반한 자이기도 하다.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원령공주>에서 아슈타카가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슈타카, 그는 멧돼지로부터 마을을 지키려다가 팔에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는 저자의 말처럼 그에게는 운명이다. 그래서 그는 마을 떠난 것이다. 아니다. 그 마을에서 쫓겨났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는 상처의 근원을 찾아서 방랑한다.

그리고 자신과 인과관계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룰(?)을 가지고 그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닌 오직 양쪽 다를 껴안으려는 바보짓을 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는 '에보시'도 보호하고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산'도 보호해야 하는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짓을 한다.

그는 '산'에게도 '에보시'에게도 게임의 룰을 깨는 훼방꾼일 뿐이다. 쉽게 말해 왕따이다. 그래서 그는 둘에게 다 냉대를 받는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규범을, 규칙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데코룸적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트릭스터는 집단과 집단, 가치와 가치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자이기에 그의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금기를 위반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장(場)의 속성을 바꾸고 적합한 규칙을 새로이 만든다면 영웅이 되지만, 그것에 실패에 할 경우 그는 처형되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왕따가 되기도 하고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자신이 새롭게 만든 데코룸이 구조화되고 고정화되면 미련 없이 다시 그것을 넘어서 가야하는 존재다. 그래서 저자는 트릭스터를 그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머무르지 않는 영원한 방랑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트릭스터는 모르긴 몰라도 인간에게 불은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트릭스터의 어원이 바로 프로메테우스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트릭스터는 중요하고 본질적인 뭔가를 항상 하늘로부터 훔칠 뿐만 아니라 오디세우스처럼 거짓말의 달인이며, 자신의 삶의 터전을 혼란으로 만들기도, 새로운 것을 구축하기도 하는 규범과 규칙을 깨는 '사기꾼' 같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왜냐면 그들은 본질적인 '고픔'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이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항상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고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우린 그런 트릭스터를 심심찮게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또 의미 있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줄 아는 자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성공과 찬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트릭스터적 삶을 애니메이션, 영화, 신화, 그리고 정신분석, 철학, 그리고 그림과 중세사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면서 때로는 깊게 때로는 쉽게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렇다고 영원한 방랑자 트릭스터가 반 데코룸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새로운 것을 구축하고 다시 길을 떠나는 존재이기에 데코룸에 머물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특히 디즈니가 만든 <포카혼타스>를 저자는 제국주의 서사라고 맹비난을 하면서도 그럼에도 '포카혼타스'가 선택의 기로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살아가기 위해 다른 것, 다른 문화를 택해야 하고 적을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포카혼타스에게는 곧 자본주의를 택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명화의 수준인 데코룸의 원칙을 수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카혼타스의 딜레마가 있을 것이며, 그의 딜레마는 시골늑대의 고뇌와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인 듯하다. 물론 늑대 루카스처럼 굶어 죽을지언정 아무것이나 잡아먹지 않는 늑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우린 저자와 다양한 논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트릭스터와 데코룸적인 삶,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왕 '한방'에 인생을 걸 것이라면 시골늑대처럼 '신간서적'에 올인 하는 것은 어떨까?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 시간의 숲에서 고대 중세 근세의 문화영웅을 만나다

최정은 지음, 휴머니스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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