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산을 배경으로 돛단배를 타고 백무와 황진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황진이의 젊고 화려한 의상과 백무의 단아하면서도 원색적인 의상이 잘 어울리면서 한 폭의 회화(繪畵)를 그려내고 있다. 색과 빛이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호수와 산이 거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면서 내면적으로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의해 차분한 장면으로 처리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황진이와 김은호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애간장을 태우는 은호와 사랑하지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신분적 제약이 가슴이 아픈 황진이가 만나는 장면에서도 “화면내의 모든 것들이 연기한다”라는 미장센의 영화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신분적 제약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끼고 있던 황진이는 대범하고 용기있는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헤어짐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은호를 만난다. 인연이 아닌 인연은 기녀에겐 고통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은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면서 황진이의 이별에 대한 결심은 흔들린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을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흉내 낸 국화꽃을 즈려밟고 가는 황진이의 마음은 김은호의 너무나 앞서가는 사랑표현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을 키워왔던 정자에 도착한 황진이가 줄을 슬그머니 끌어당기자 가락지가 청실홍실 줄을 타고 내려오는 현대식 프로포즈의 장면을 연상하는 방식으로 사랑의 기약인 반지를 받는다. 그 반지에는 ‘吾則汝 汝則吾(오즉여 여즉오)’라는 사랑도 하나이고 인생도 하나라는 로맨틱한 고백이 쓰여 있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라고 속삭이며 등장하는 김은호는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사랑의 약조를 한다. 김은호가 황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자 이별의 운명을 받아들였던 황진이 역시 사랑의 기쁨으로 눈물을 흘린다. 김은호와 황진이는 아름다운 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아한 입맞춤을 한다.
사랑은 아름다움이다. 이별도 아름다움이다. 이별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배경과 어울리는 이별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이들 두 남녀의 이별이 가슴이 아파야 하는 장면이지만 입속에서 ‘참 아름답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바로 미장센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가슴 아픈 이별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시청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이보리 색보다 진한 저고리에 차분한 붉은 치마를 입은 황진이의 의상과 하늘색 보다 연한 남색 한복을 입은 김은호와의 만남은 배경적으로 감상적으로나 대조적이다.
황진이의 마음은 신분사회의 넘을 수 없는 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황진의 옷은 꺼지지 않은 사랑을 붉은 치마를 통해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김은호가 입은 연한 감색의 의상은 애끊은 사랑의 감정을 간직한 김은호의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여주고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감정을 색상을 통해 절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단지 화려함만을 추구하지 않은 화면구성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면서 많은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단지 한복의 화려함만을 보여주는 사극과는 달리 색상에 의한 다양한 심리적 반응과 심상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영상미를 통해 감정이입의 고상한 정감을 드라마 <황진이>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영상미를 추구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뻔한 스토리를 갖는 경향이 많다는 사실은 드라마 <황진이>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영화 <형사>가 다모와 비슷한 빈약한 스토리 때문에 영상미는 뛰어났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드라마 <황진이>도 스토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극적인 이야기의 전개와 대화의 묘미를 한껏 뽐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다”라는 사랑고백과 같은 언어적 재치가 극의 흥미를 한껏 높여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황진이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요소인 기보다는 예술과 문학을 지향하는 이야기의 전개가 드라마 <황진이>의 매력이 되지 않을까 한다.
색과 빛이 어울려 하나의 기분좋은 화면을 만들어내는 영상미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보기도 좋고 미소를 짓게 만드는 화면은 드라마 <황진이>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윤석호의 <봄의 왈츠> 이후에 미학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는 드라마 <황진이>는 또 다른 의미와 진정성을 가진 사극으로 자리매김하길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노태영 기자는 남성고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