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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하는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소재한 용암산은 해발 544미터에 불과한 높지 않은 산이지만, 그 안에 사계절의 풍치와 기암과 바람이 사무친 아름답고 귀한 산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눈을 들면 무등산이 언뜻 스치고 눈 아래에는 맑은 물이 넘치는 곳. 무등산이 지루해질 무렵 인근의 산들을 마음 속으로 그리다가 마침내 생각이 머무는 곳이 용암산이다.

늘 다니는 곳이건만 3년 전 큰아이의 수능 때도 이곳을 오르며 아이의 인생과 고통, 그리고 희망에 대해 생각했던 추억이 서려 있다.

등산은 용암사라는 사찰에서 시작된다. 초입에 사찰의 울바자처럼 서 있는 땡감나무가 여전히 앙증맞게 작은 감을 바람에 띄우고 있다. 산 감이라고는 하나, 저처럼 작은 감이 있다는 게 사뭇 신기할 따름이다.

▲ 땡감나무의 모습
ⓒ 고성혁
능선까지의 가을 길은 사뭇 고즈넉하다. 올가을의 이상 기온 때문인지 아직 많은 나무들이 푸른 기운을 띠고 있지만, 그래도 소롯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발길마다 바스락거리는 울림이 산을 메운다. 외지의 산객들이 접어놓은 길 표시 리본이 팔랑거리고, 길에는 가을 열매가 도톰한 형용으로 계절을 이야기한다. 능선까지의 길은 완만하고 정중하여 마음을 편안케 한다.

▲ 외래 등산객들의 길표시 리본
ⓒ 고성혁
작은 아이의 어린 시절도 능선에 이르는 이 길처럼 평범했다. 공부는 싫어하고 놀기는 좋아하는, 그래서 싫을 때면 바둑학원도 과감히 빼먹을 줄 아는 우리 주변의 흔한 아이였다. 제 형과 가끔 다투면서도 놀랄만한 우애를 보여줬으며, 낮시간 일해야 하는 엄마보다는 늘 같이 손잡고 이야기하는 할머니를 더 좋아해 잠이 들 때도 할머니의 내의를 부여잡고 할머니의 머리냄새를 맡아야만 잠이 들었다. 그래서 제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만 15년을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 어머니와 작은 아이
ⓒ 고성혁
능선에서 사방이 툭 터진 '트임'이 있는 곳까지의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급경사가 계속되면서 로프를 잡아야만 오를 수 있는 곳에 이르면 듬성듬성 바람에 쓰러진 큰 나무의 잔해와 엇갈리는 바위길이 몸을 퉁탕거린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과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오는 가을의 내음. 거친 호흡으로 뜨거워진 몸으로부터 잡기가 스러지고 이내 환골탈태의 생기를 얻는다. 가을물이 가득한 하늘과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보인다. 또 있다. 절벽 아래에서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해 빨갛게 익은 몇 알의 맹감이 가슴 저 밑바닥을 자극한다.

▲ 절벽 위에 매달린 외로운 맹감
ⓒ 고성혁
그러던 작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더니 너무나 달라져 놀라게 했다. 입학 후 며칠이 지날 무렵부터 거의 매일 싸우는 것 같았다. 터진 입술과 벌겋게 부은 눈두덩으로 집에 돌아와 놀라게 했다.

걱정 끝에 아내가 학교를 찾았지만 선생님은 "착실한 학생"이라고만 했다. 아이 또한 별일이 아니라고 애써 태연히 말했다 그렇게 보름여가 지나고 나서 아내의 간곡한 정성에 아이가 이내 입을 열었다.

싸웠노라고,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 없어 얕잡아보고 너무 함부로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매일 저녁 그 아이들과 정당한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랬었다. 제 형의 고교입학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어 학군이 갑자기 바뀌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진다. 인생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것.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이 오롯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열린 가을을 성큼성큼 걷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온 산을 울린다.

▲ 낙엽에 덮인 산길
ⓒ 고성혁
벼랑 끝에 걸린 붉은 단풍이 잿빛 나무로 하여 더욱 선명하고 그 광경 안에 낙엽 하나 유유히 부유한다. 자갈길을 딛고 산성 터에 올랐다.

▲ 낭떠러지, 그리고 단풍
ⓒ 고성혁
다시 철사다리를 지나 정상이 보이는 암릉으로 올랐다. 온몸으로 부딪는 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순하디 순한 전라도 길의 흰 속살이 드러났다.

아, 그때 깎아지른 절벽의 고독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낭떠러지에 걸린 하늘이 해거름의 쇠잔한 햇살로 떨고 있다. 가을, 그리고 저물 녘의 쓸쓸한 산 풍경이 내 아이에 대한 애잔함으로 바싹 다가선다.

▲ 봉우리에 걸린 하늘
ⓒ 고성혁
- 한새야, 이제 수능까지 저 햇살만큼의 세월만 남아 있구나. 고3으로서의 고통과 번민으로 네 영혼이 마치 이 가을처럼 말라 있는 걸 왜 모르겠니. 하지만 우리 함께 힘을 모아 이겨내자꾸나.

사실, 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급격히 허약해졌다.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자주 코를 훌쩍였으며, 눈 또한 수시로 충혈되어 안과 치료를 받아 왔다. 감기는 아이의 전유물이었다. 나도 걸리지 않는 감기를 아이는 달고 살았다.

그보다 더한 것은 비문증이었다. 하늘이나 흰 벽, 기타 밝은 면을 보면 시야 속에 희미하게 모기와 같은 흐릿한 물체가 보이며, 시선을 움직이면 그에 따라 이동하는 증세로 아이의 경우는 형체가 아주 컸다.

가족을 위해 늘 양보해온 아이로서도 비문증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저녁 제 방에서 공부하던 아이가 갑작스레 아주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소리에 놀란 아내도 아이의 호소에 눈물짓고 나 또한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눈시울을 붉혔었다. 그런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 수능이 20일도 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정상에 올라섰다. 사방에서 산들이 그 갈기를 드러낸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건너 산의 기암에 붙어 있는, 분재와 같은 작은 소나무로부터 신묘한 산의 정령이 다가서는 듯하다. 아내로부터 생수병과 사과를 넘겨받아 정상 표지석에 놓고 예수님과 부처님, 산신령과 천지신명, 그 밖의 모든 신들께 너부죽이 절을 올렸다.

▲ 간절한 기도
ⓒ 고성혁
신들이시여! 부디 내 아이를 건강하게 지켜 주십시오. 이번 수능에서 실수 없이 공부한 만큼의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수능을 끝내고 나면 내 아들의 가슴에 가을 하나가 뚝 떨어져 강물처럼 흐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해거름의 허무와 서러운 고독도 익힐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이 그의 심장을 도는 선홍빛 피가 될지니 실패와 설움을 딛고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묵상하는 참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에게 부디 눈물 또한 주십시오.

▲ 흙속에 묻혀가는 도토리
ⓒ 고성혁
바람의 배웅을 받으며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 바람에 문풍지처럼 떨고 있는 잎 큰 마른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아내의 늙은 뒤 태를 바라보다가 먼 산을 좇아 우리들의 노후를 생각하기도 했다. 추적추적 걸음 하는 길목, 시월이 다 가고 있음에도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다. 의연히. 마치 우리 내외의 기원처럼 피어있었다.

▲ 바람에 날리는 이름모를 풀꽃
ⓒ 고성혁
2006 가을 소고(小考) - 고3의 일탈을 위해

이제 그만 상심과 욕기(慾氣)를 거두렴.
그리하여 네 가슴에 뚝 떨어진 이 가을을 보듬어
흩날리는 낙엽과 교교한 달빛의 슬픔까지 넉넉히 느껴보렴.
더러는 절망으로부터 솟구치는 희망의 의미를 위해
네 열정과 선혈까지도 젖은 짚단처럼 눕히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은 없는 것.
실패야말로 바람의 분방한 자유를 위한 것.
비움으로 오히려 생명을 얻는 깨달음으로 고통까지도
껴안을 수 있으면 좋겠거니
네 들끓는 청춘을 위하여 아들아,
삶의 솟대를 높이 세우고 이 가을의 음성을 듣지 않으련.

(아들을 위한 졸시 전문)

덧붙이는 글 | 대한민국의 모든 고3과 부모님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힘듦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용암산은 전남 화순에서 능주를 지난 한천면에 있습니다. 광주에서 한천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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