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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위스콘신의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설탕가루 같은 눈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걸 보면 이 눈이 언제 쌓일까 싶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온 세상은 하얗게 바뀌어 있기 일쑤다. 이 눈을 바라보거나, 피하거나,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 이외의 용도로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겨울을 네 번이나 넘긴 후였다.

4년 전, 위스콘신만큼이나 눈이 많이 내리는 뉴욕에서 온 친구 숀이 스키를 타러가자는 제안을 해 왔다. 호기롭게 따라 나서기는 했으나, 내 실력은 오래 전 직장 수련회에서 두 차례 받은 단체강습이 전부였다. 역시 눈은 바라보거나, 피하거나, (특히) 넘어지는 용도로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흘렀다. 여름이 저물 때쯤 요시라는 일본친구를 알게 되었다. 말이 '친구'지, 우리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나 일본어로 대화했다면 '선생님'이라는 칭호로 깍듯이 모셔야 할 만큼의 나이차였다. 요시는 10여 년 전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매디슨에 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입에서 어느 한 단어가 나오자 요시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바로 '스키'라는 단어였다. 옆에 있던 요시의 아내 다카코가 웃으며 말한다.

"제 남편은 가을이 가기도 전에 스키부츠를 꺼내서 신어보기 시작하는 걸요."

ⓒ 강인규
눈이 오기도 전에 스키 부츠 신는... 나의 스키 강사 요시

요시는 다리가 하나뿐이다. 태어날 때 왼쪽 다리에 치명적인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왼쪽 다리의 통증으로 인해 운동은 물론, 일상적 활동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다리 절단 수술을 결심하고 병원을 찾아간다.

당시 의사는 '18살이 되면 다시 찾아오라'고 요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의사 말대로 성인이 되던 해에 다시 의사를 찾았다. 절단 수술을 받은 요시는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만능스포츠맨으로 거듭났다.

요시는 스키 뿐 아니라 배드민턴, 수영 등에도 프로급 실력을 갖춘 만능 스포츠맨이다.
요시는 스키 뿐 아니라 배드민턴, 수영 등에도 프로급 실력을 갖춘 만능 스포츠맨이다. ⓒ 강인규
요시는 혼자서 스키를 배웠다. 친한 친구가 스키를 권하고 함께 다니기는 했지만, 두 다리를 지닌 친구는 요시에게 '타는 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강습은커녕, 서점에 널린 '스키교본'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개의 스키 위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타야 하는 스키기술이 요시에게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는 쓰러지고 다시 쓰러지며 스키를 배웠다. 넘어지지 않고 언덕을 내려오는 '기술'을 익히는 데에만도 몇 년을 투자해야 했다. 어느 정도 스키를 타게 됐을 무렵, 그는 심하게 넘어져 골반 골절을 입었다. 그리고는 스키를 그만두었다.

몇 해가 지났다. 상처를 회복한 요시는 친구의 권유로 다시 조금씩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체형에 맞는 스키 폴대도 스스로 만들었다. 요시는 이제 눈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다. "남편은 눈 위에만 서면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 다카코의 말이다.

다리는 하나뿐이지만 눈 위에만 서면 그는 자유인

ⓒ 강인규
나는 요시와 처음 스키를 타러 간 날을 잊지 못한다. 스키를 타는 사람이 그처럼 아름답게 느껴진 적은 없다. 그가 스키를 타는 모습은 눈 위를 가볍게 나는 우아한 새와 같았다.

요시의 스키 실력에 감탄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스키장의 모든 사람이 그가 눈 위를 날 듯 내려 올 때 예외 없이 턱을 떨어뜨렸다. 나는 으쓱해서 말한다. "제 친구예요."

요시는 아주 특별한 선생님이었다. '백약이 무효한' 나의 둔한 운동감각도 그의 자상한 가르침으로 서서히 날이 서기 시작했다. 요시는 '에지(edge)' 기술을 가르칠 때에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내 스키를 직접 손으로 눌러주기까지 했다.

요시와 지내는 겨울이 한 해 두 해 늘어갈수록 나 역시 눈 위에서 점점 자유로워졌다. 그는 스키강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강습 비결은 혼자 스키를 배우며 겪은 어려움에서 나오는 듯했다. 함께 리프트를 타며 그의 멋진 사랑 이야기도 들었다. 아름다운 다카코도 스키를 인연으로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 강인규
내가 한국에 머무는 사이 매디슨에서는 눈이 내렸다고 한다. 이제 그곳에서 요시와 함께 스키를 탈 수는 없을 것이다. 요시는 지난 겨울이 가기 전 일본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그와 스키를 타러 간 마지막 해, 리프트 위에서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어나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그가 대답했다. '가장 극복하기 힘들었던 것은 마음의 장애'였다고.

벌써 낙엽이 지고 있으니, 요시는 벌써 오래 전 스키부츠를 내놓았을 것이다. 나는 요시처럼 날렵하게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꿈을 꾼다. 하지만 내가 도중에 넘어지더라도 요시는 언제나 그렇듯 내게 환한 웃음을 선물할 것이다. 나의 특별한 스키 선생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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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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