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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치의 마지막 연인>
책 <하치의 마지막 연인> ⓒ 민음사
"살아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에서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내 귀가 알아들을 수 있고 색깔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안 지 얼마 안 된 하치뿐이었다. 그래서 하치랑 지내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나 자신과 데이트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주 짧고 애틋한 랑데부였지만, 모든 것을 보듬고 있는 싹 이었다." - <하치의 마지막 연인> 중에서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먼저 쓰디쓴 초콜릿을 꺼내 먹고 나면 상자 안에는 좋아하는 것만 남게 된다고, 어떤 이는 내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던 당시의 나는 쓰디쓴 초콜릿만을 연이어 먹고 있었기에, '앞으로 단 걸 먹는다고 해도 맛을 모를 게 분명해'라고 생각했다.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여러 가지로.

나라 전체가 월드컵의 열기로 들썩이던 2002년 여름, 나는 삶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빚쟁이들에게 쫓겼고, 세간도 얼마 남지 않은 집 구석구석에는 빨간 압류 딱지가 날아와 붙었다.

집 앞에는 빚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후에 안 사실이지만) 집 안에는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되었다. "죽여 버리겠다"며 걸려오는 전화에 지친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이어지는 생활고는 끔찍했다. 빨간 티셔츠 한 장조차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다.

당시 사립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나는 등록금은커녕 차비도 없어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고3 신분임에도 학교와 점점 멀어지던 어느 여름날, '그 아이'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다가왔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 이 책 속 여름날의 도넛 가게에서 하치와 마오가 '운명적으로' 만난 것처럼.

머리 위에 먹구름이 따라다니던 시절이었지만, 그 아이와 있을 때만큼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많은 말을 하지도, 자주 데이트를 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금빛으로 물든 길을 손 잡고 걸을 때면,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서로 안아줄 때면, 내 머리 위 먹구름은 사라지고 별빛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나의 유일한 비상구였던 그 아이 때문에 살던 시간이었다. 끝없는 전화통화를 이어 가던 어느 무덥던 밤, 그 아이는 내게 <하치의 마지막 연인>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얼마 후 도서관에서 찾아낸 책은 내 마음을 후벼 파듯 아픈 구절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인공 마오는 불안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십대 소녀이다. 집은 '종교단체 비슷한 곳'이고, 엄마는 마오의 혼란이나 정신적 괴로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남자들과 끊임없는 육체관계를 갖는다.

"아이들은 천국에서, 어느 엄마의 몸으로 들어갈까를 정한다는 얘기가 있다. 분홍빛 뭉게구름 위에서 이루어진 천사의 결단이다. 그때부터 이미,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불길한 일의 중심은 언제나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다리오 아르젠트가 말했다." - 책 중에서

마오는 불길한 일의 근원지를 떠나 하치에게로 향한다. 인도에서 온, 성자같이 따스한 눈을 가진 하치는 마오에게 편안한 집을 제공해주고 그녀의 옆에 있어주며, 미래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하치는 자신이 1년 후 히말라야로 수련을 가게 될 '운명'이라 얘기하고, 마오는 그런 그를 애써 붙잡아두려 하지 않는다. 기간이 정해진 연인…, 짧은 기간의 사랑이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순간순간이 애틋한, 하치와 마오는 조용히 그들에게 남은 시간을 아끼며 사랑한다.

어느새 1년이 다가와 이별 여행을 하고, 히말라야로 떠나는 하치를 배웅하며 마오는 다양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하치가 그곳으로 가는 것에 인생을 걸고 있음을 알기에, 한 사람의 인간이 진심으로 결정한 일은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없음을 알기에' 애써 웃으며 하치를 떠나보낸다.

남자 수도승뿐인 곳에서 카푸치노도, 비디오도, 음악도, 술집도, 섹스도 없이 수련에만 정진하게 될 하치에게, 마지막 사랑으로 남을 마오를 보며 나 역시 언젠가는 그 아이와 헤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했고, 투명했지만 그 사랑을 이어가기에 우리는 너무나 어리고 서툴렀기 때문이다.

이별 후의 나는, 하치를 떠나보낸 후의 마오처럼 많이도 울고, 방황하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끔찍한 생활을 하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더이상 불행하지는 않았다. 하치가 마오의 가슴속에 피우고 간 싹처럼, 나의 메마른 가슴에도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법 손때가 탄, 내 책장 한구석에 꽂힌 이 책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시절 우리를 떠올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날 감싸 안아주던 그의 따뜻함을, 나는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이후에도, 영원히….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 입니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민음사(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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