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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무용단 90회 정기공연 <소울, 해바라기> 피날레 장면
ⓒ 김기
국립무용단으로 돌아온 배정혜 예술감독이 첫 작품을 내놓았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0월 27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소울, 해바라기>는 음악 전체를 한국을 사랑하는 독일 그룹 살타첼로에게 맡겨 공연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공연이 열린 31일, 관람을 미루던 관객들이 놓칠세라 몰려들었고 극장은 3층까지 빼곡하게 들어찼다.

배정혜 안무, 우재현 연출, 무대미술 이태섭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소울, 해바라기>는 국립무용단의 2006년 첫 번째 작품이어서 무용계의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화제는 한쪽으로만 생성되는 법이 없듯이, <소울, 해바라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 채 회자되었다. 평단의 평가는 대체로 썩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젊은 일반인들은 특히 2막의 내용에 호감을 많이 보였다.

<소울, 해바라기>는 2막 구성에 총 공연시간이 1시간 40분 정도 되는 대작이다. 1막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그리움을, 2막에서는 거꾸로 죽은 자가 산 자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막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느린 동작이 펼쳐지고 진행 속도도 느려서, 자칫 긴장을 풀었다가는 저녁 피로에 깜빡 잠에 속기 십상일 정도이다.

▲ 무용수들의 첫 등장 장면. 고운 한복을 입고 있는 듯하던 여인들이 속옷차림으로 벗어난다. 마치 혼령처럼.
ⓒ 김기
1막은 시작부터 속도감을 상실할 정도로 느리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검은 정장에 중절모를 쓴 사내가 느릿느릿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넓고 텅 빈 무대를 오간다. 그 한 곡이 끝나고, 무대 곳곳에 3대의 첼로와 더블베이스 그리고 색소폰 주자들이 석상처럼 배치되어 연주를 이어갔다. 재즈와 샤먼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2막은 1막에서 아껴두었던 모든 힘과 정열을 함께 쏟아 붓는 듯, 쉴 새 없이 빠르고 현란한 군무로 구성되었다. 2막의 화자(話者)가 죽은 자인 까닭에, 표현되는 것은 귀신 혹은 도깨비쯤이 된다. 귀신들의 요란스런 군무에 눈을 온통 빼앗기는 동안에도 객석까지 깊게 뻗은 제단에서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한다.

조명조차 낮은 어머니의 기원은 군무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무당의 역동적 동기로 읽혀졌다. 무당이 자주 오르는 또 다른 제단 항아리에서는 2막 거의 내내 향불이 피어올랐다. 향내는 서서히 객석으로 번져 작품을 보는 시선에 은근한 강제를 내포한 듯 했다. 군무가 몇 차례 휘몰아친 후, 제단의 어머니가 오랜 침묵을 접고 몸을 일으키면서 무대는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 짙은 브라운 배경에 을씨년하게 선 폐허의 나무들. 그 사이에 소복의 여인들은 충분한 애상을 주었다.
ⓒ 김기
그 긴장 속으로 죽은 아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무녀는 초혼에 지쳐 한쪽에 쓰러진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이 영속할 수는 없는 법. 모자가 가슴 메어지는 이별을 다시 겪는 장면은 무대 한쪽을 몽땅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안개와 빛으로 가득했다. ‘찬란한 이별’이란 말을 실감나게 하였다.

찬란한 이별은 죽음 혹은 그리움에 대한 상식적 정서와는 딴판으로 축제적 장면으로 이어졌다. 빨간 부채를 양손에 든 군무는 산 자니, 죽은 자니 하는 경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경지를 표현했다. 마치 종교 행위 속에 자주 빚어지는 몰아의 상태를 연상케 했다. 환각과는 다른 샤먼적 엑스타시의 순간이 많은 2막의 군무 중에서도 피날레는 장관이었다.

이후 무대를 가득 채운 무용수들 머리 위로 끊임없이 종이눈이 내리고, 그것은 객석 절반 정도까지 확대되었다. 그때 살타첼로가 연주한 곡 제목은 ‘소주 파티’였다. 처음으로 기악연주만이 아닌 노래를 곁들인 이 곡은 그들이 외국인인 까닭에 ‘such a body’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주파티나 ‘such a body’나 문제될 것은 없었다.

▲ 목없는 귀신들이 항아리북을 친다. 깊이 상상하면 섬뜩한 장면인데, 공연 속에서는 살타첼로의 음악 덕분인지 그저 도깨비들의 잔치로 여겨졌다.
ⓒ 김기
아니 그 노래 이전에 빠르게 변주된 건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였다. 관객들은 무대로 뛰쳐나가지 않았을 뿐 거의 마음은 무대 위에서 무용수들과 난장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국립무용단의 무용과 살타첼로의 음악은 충분히 관객들을 감정을 들뜨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연이 끝나고 무용평론가 장광렬씨는 흥분한 듯 “이게 국립이 가야 할 길이다, 몇 군데 손보긴 해야 하지만 전통에 매이지 않은 한국적 컨템퍼러리를 보여주었다”고 극장 관계자에게 격앙된 듯한 말을 전했다.

공연을 마친 배정혜 감독은 만족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첼로와 살풀이의 결합을 한 5년 전쯤부터 생각해왔다. 그것이 살타첼로와 작업하게 된 가장 큰 동기이다. 이번 작품은 하나로 만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몇 개의 독립된 단품으로 분리할 수 있다. 한국의 춤과 서양의 음악이 결합된 이번 작품은 해외에서의 상품화 가능성이 높도록 의도했다. 그런 점에서는 앞으로 더 다듬어야 하겠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운 결과다.”

▲ 조용하고 느릿한 1막과 달리 2막은 각종 귀신들이 소란스럽게 등장한다. 명태를 양손에 들고 머리에 상모를 쓴 무용수들의 익살스러운 장면이 재미있었다.
ⓒ 김기
대작 연출을 처음 맡은 국립무용단원 우재현씨는 “몇 년 있다가 바뀌는 예술감독과는 달리 국립무용단 단원들 가슴 속에는 뭔가 아쉬움과 열망이 존재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이번 작품으로 분명치 않은 그것의 실체에 조금은 다가섰다고 본다, 그것에 만족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짙은 브라운 계열로 시작해서 끝에 가서는 빨간색이 지배한 <소울, 해바라기>의 무대는 사막의 고사한 나무들을 상징한 무대가 인상적이었다.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조명과 음악 그리고 무용과 어우러져 신비감을 주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소울, 해바라기>는 재즈와 샤먼이 나서, 생과 사의 넘나들 수 없는 엄격한 경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되 처절한 것이 아니라 축제로 표현했다. 이러한 역설적 발상의 독특함에 동감할 수 있다. 그러나 1시간 40분의 시간이 공연으로서 반드시 길다는 기준은 없지만, 무용언어의 함축미학을 보강하면 좋겠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소울, 해바라기>를 돋보이게 한 일등 수훈은 조안무와 주역을 맡은 장현수였다.
ⓒ 김기
끝으로, <소울, 해바라기>를 말하면서 빼먹으면 안 될 사람이 있다. 아니 국립무용단을 말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옳다. 이번 작품에서 조안무와 주역인 무녀 역할을 맡은 장현수. 공연 전 연습실에서건, 공연 무대에서건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자기 것이 아닌 사람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진짜 신이 내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역할에 빠져들었다. 객석 멀리서도 그녀의 몰입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넋 나간 듯 신들린 연기로 <소울, 해바라기>에 부족한 듯한 전통의 정서를 보충해준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살타첼로 리더 피터 쉰들러 짧은 인터뷰

당신의 음악에 샤마니즘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작곡을 할 때에는 어떤 목적을 두고 하진 않는다. 다만 그때마다의 영감과 나의 음악적 철학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 샤만이 있다거나 없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유럽은 동양과 다른 종교적 환경 속에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 모든 나라, 모든 대륙에는 사람이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샤만의 요소는 모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번 공연 동안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피웠던 향불의 느낌은 내가 오랫동안 성당에서 겪었던 향과 촛불 그리고 그 안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은 흥미로운 단서였다.

국립무용단과 공동작업에서 어려웠던 점과 좋았던 점 하나씩을 꼽아달라

일반적 컨써트와 참 많이 다른 경험이었다. 평소 컨써트라면 중간에 말도 하고, 연주 사이에 쉴 틈이 있으나 무용과는 그런 여유가 없는 긴장감이 힘겨웠다. 또한 짜여진 시간 속에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씽코페이션이 허용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어려웠다기보다는 다른 경험이었을 뿐이다.

내 곡을 통해 영감을 받은 안무가가 음악을 무용으로 발전시키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했다. 한편으로는 독일의 음악과 한국의 전통이 어울린 이번 만남은 진정한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라는 의미를 갖는다.
/ 김기


▲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미의 오열 앞에 무녀는 아들을 불러내고자 주술행위를 한다. 무녀 손에 들린 몽당비자루는 진도 씻김굿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같다.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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