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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감옥 입구.  겉으로 보면 도저히 감옥같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학생감옥 입구. 겉으로 보면 도저히 감옥같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 한대일
학생감옥 입구는 어느 때는 문이 열려있고, 어느 때는 문이 닫혀있다.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이 학생감옥의 현 주인인 듯 관람객이 없을 때는 문을 닫아둔다. 따라서 개방시간인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사이(4월부터 9월을 기준으로)에는 설사 문이 닫혀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러서 주인에게 열어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학생감옥 입장권.  일반은 2.50 유로, 학생은 2 유로이다.
학생감옥 입장권. 일반은 2.50 유로, 학생은 2 유로이다. ⓒ 한대일
중세 대학은 치외법권, 즉 국가의 법이 미치지 않는 곳이어서 학생이 죄를 지어도 이를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시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행패가 이어지자 참다 못한 시민들이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대책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1778년에 만들어진 것이 학생감옥이다.

명색이 감옥이니 낡은 침대에 빵과 물이 전부였지만, 혈기 왕성한 학생들은 술과 음식을 몰래 들여온 뒤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오히려 감옥 안에서 맘놓고 이런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자 나중에는 자청해서 감옥에 들어가려는 학생들도 생겼다고 한다.

또한 엄격한 교칙에 대항해서 학생감옥에 간 학생들은 자신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근 150년 동안 운영된 학생감옥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1914년에 폐쇄됐고 지금은 옛 흔적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다.

학생감옥 내부의 계단.  벽면이 낙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학생감옥 내부의 계단. 벽면이 낙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한대일
입구를 통과한 뒤 먼지가 많이 낀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 낙서로 가득 찬 벽면을 보게 된다. 낙서의 내용은 학생들의 구호와 이념이 주를 이룬다. 복도부터 시작된 이 낙서는 방안에서도 벽면을 가득 채운다.

최근까지도 방안에 직접 들어가 낙서를 만져볼 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그 벽면에 새로운 낙서를 채워넣었기 때문에 지금은 난간으로 막아둔 상태다. 하지만 설사 만져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학생감옥의 그 '기괴한'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낙서 금지 안내문.  영어, 독일어와 함께 한국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낙서 금지 안내문. 영어, 독일어와 함께 한국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한대일
일반적으로 독일은 규칙을 매우 철저히 지키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윗사람에 대한 반항없는 순종적인 스타일이며, 이런 독일인의 국민성은 양차 대전을 일으킨 원인인 동시에 '라인강의 기적'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인들이 '무조건' '끊임없이' 윗사람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라는 절대왕정의 시대를 겪었고, 또한 프랑스로부터 불어온 혁명도 독일 내에서 거친 태풍을 몰고 왔다.

30년 전쟁으로 수백 개의 조그만 영주국으로 갈라져 버린 독일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함께, 프랑스에서 불어온 자유·평등과 같은 근대적 이념은 독일의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은 농민해방과 책임내각제와 같은 근대적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주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보수파 세력 '융커'의 배척과 내각제에 대한 프로이센 군주의 두려움, 그리고 민족주의로 흘려갈 것을 염려한 나폴레옹에 의해 슈타인은 파면당한다.

하지만 독일 대학생들은 이런 슈타인의 개혁정책에 환호했고, 프랑스 혁명정신의 계승, 독일 통일을 위해 다방면에서 민족주의적 운동을 펼친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기존의 반동적 생각으로 똘똘 뭉쳐있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감방 내부.  파티의 즐거움 속에서도 자신의 이념과 구호들을 채워넣었다.
감방 내부. 파티의 즐거움 속에서도 자신의 이념과 구호들을 채워넣었다. ⓒ 한대일
하지만 이후 등장한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는 이런 학생들의 운동을 탄압했다. 더욱이 독일 바로 옆에는 당시 보수국가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가 있어서 독일의 혁명은 프랑스의 그것과 달리 원활히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독일 대학생들의 혁명은 좌절됐고, 빈 체제가 무너진 1848년 이후 그 세력이 잠시 꽃을 피울 듯했지만 이후 연거푸 등장한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의 민주주의 사상은 크게 후퇴하고 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의 지식인들은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고, 국가는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해서 결국 양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만들고 만다.

감방 내부.  시트없이 골격만 남은 저 침대도 역사의 산 증인이다.
감방 내부. 시트없이 골격만 남은 저 침대도 역사의 산 증인이다. ⓒ 한대일
학생감옥은 이렇게 독일 대학생들의 뜨거웠던 혁명정신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프랑스로부터 온 근대적 이념들은 그들의 두뇌를 자극시켰고, 끊임없이 기존 사회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좌절감을 맛본 일부 학생들은 술에 취한 채 행패를 부리다가 감옥으로, 또는 학교의 부당한 교칙에 항거한 학생들도 교칙 위반으로 감옥으로….

어떤 원인이든 학생감옥은 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독일 학생들의 정신과 이념과 한(恨)이 고스란히 남은 곳이다.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19세기 초기, 그리고 그 좌절감이 널리 퍼진 19세기 중기와 말기, 그리고 자포자기의 상태에 놓여진 채 국가와 군주의 권력이 비대해진 20세기 초기….

학생감옥은 이런 격변기를 거치면서 각 시대상을 반영하는 낙서들로 채워졌고, 그것은 현재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학생감옥을 단순히 관광지가 아닌, 좀 더 시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각종 사진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독일의 격변기였다.
각종 사진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독일의 격변기였다. ⓒ 한대일

덧붙이는 글 | 한대일 기자는 'Epsilon'이란 필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싸이월드에 '입실론의 C.A & so on Travel 가이드페이퍼'라는 길고도 지루한 페이퍼를 발행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을 알려줌으로써 차가 없는 학생이라도 입장료만 있으면 어디든 쉽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여행의 궁극적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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