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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도움도 좋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 행복한 일이다. 어쩌다 한 번 복지시설을 찾는 것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더 보람된 일이다.
주 1회, 월 2회 정도 봉사자들과 함께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찾아가 도움을 주는 단체가 있다. 이름하여 '가정방문실'. 수녀님 두 분이 마티즈에 사랑과 정성을 담아 가정을 직접 방문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때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병원에 모셔다 드리기도 하고, 반찬이나 필요한 물품들을 전해주기도 한다. 때로는 말벗이 되어드리고, 봉사자들과 이불빨래도 해 드린다. 가정을 방문해서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랑의 119 봉사대'인 것이다.
지난달 29일은 가정방문실에서 그 분들을 모시고 단풍나들이를 다녀왔다. 할머니 14명과 봉사자 20명.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잘 걷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휠체어를 탄 청년과 자매가 특별한 손님으로 버스에 올랐다. 고창 선운사로 향하는 농촌 마을은 추수를 마친 나락이 군데군데 햇빛에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가을 가뭄이 심해 아직 단풍이 들지는 않았지만 자연은 우리를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그 넉넉한 자연을 제대(=제단) 삼아 잔디밭에서 미사를 마친 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돼지 주물럭으로 점심을 먹었다. 상추에 고기 한 점씩 얹고 한 입 가득 넣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정겹다. "왜 이렇게 맛있디아!" "여럿이 먹응께 맛있지!"
소화도 할 겸 선운사 산책을 나섰다. 문제는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할아버지였다. 대문 밖 출입조차 못하시는 할아버지이시고, 모처럼 단풍구경을 오셨던 터라 차마 버스에 계시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 할아버지의 팔을 부축하고 10여 분을 걸었던 모양이다.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이심전심일까. 매표구에서 일하시는 아저씨가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시고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표 끊지 말고 그냥 들어가세요"라고 하신다.
입구에서 기다리시겠다는 할아버지를 봉사자 형제 세 분이 교대로 업기로 했다. 할아버지 입가에 환한 낮달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를 업고 계곡을 따라 얼마나 올랐을까. 울창한 단풍나무와 삼나무, 여러 수종의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할아버지를 업은 형제님 이마의 땀방울을 찬란하게 비춰주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경내는 이른 단풍철로 한산해 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올라오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약수 한 잔으로 땀을 식히는 한 형제의 모습은 단풍보다 아름다웠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움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땀을 식히고 목도 축인 뒤, 암자까지 오르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휠체어 속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책로에 뻗어 있는 뿌리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휠체어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심보다.
길에 박힌 큰 돌들도 걸림돌이 되었다. 전동휠체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가는 형제님 이마에도 땀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힘들면 돌아오겠다는 휠체어는 그렇게, 암자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운동장에 이르렀다.
그곳에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식사를 마친 뒤 음료수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트로트 메들리에 흥이 난 것일까. 한 장애인이 전동휠체어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었다. 그때 한 봉사자가 그 장애인의 손을 잡았고, 장애인은 봉사자의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올리더니 한 바퀴 휭! 돌렸다. 멋진 지르박을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가슴 찡한 광경이요, 멋진 춤이었다.
할머니 한 분과 손을 잡고 지르박을 추다가 장애인과 춤을 추었다. 신이 난 할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뇨 때문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데 맥주까지 마신 할머니의 흥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흥겨운 한마당을 뒤로 하고 하산하는 길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시던 할머니 한 분이 다리가 아프다며 자리에 앉자, 봉사자들이 뛰어가 할머니의 두 다리를 주물러 드린다. 효도가 따로 없다.
버스에 올라 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기쁨조가 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랑과 행복 실은 이동버스 노래방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선운사 가는 길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하셔서 선운사 풍기를 문란케 한 할머니의 노래를 먼저 듣겠습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콩밭 메는 아낙네야…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버스는 어느새 전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만남'을 마지막 곡으로 사랑을 실은 노래방은 거기서 막을 내렸다. 할머니들을 먼저 내려드리고 출발지였던 전주교대 부근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였다.
다리가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트럭에 태우고 옛 철길도로를 달렸다.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슬레이트집으로 들어서자 개 세 마리가 반갑게 꼬리를 치며 짖어댔다. 할아버지와 한시도 떨어진 일이 없었던 개들이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어둑한 마당에서 한참 동안 손을 흔드시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골목길을 돌아 나올 때였다. 오른쪽다리가 마비된 팔을 부축하고 선운사로 가는 길에 들려주셨던 할아버지의 한 마디가 귓전을 맴돌았다.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어요. 버스를 타고 단풍 구경 가기는 처음이에요. 제 마음에 영원히 색이 변치 않을 사랑의 단풍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