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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도 '묻지 마' 투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페이지 부부.
미국에도 '묻지 마' 투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페이지 부부. ⓒ 한나영
그래서 우리 집을 방문한 페이지 부부에게 이번 선거에 대해 질문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뽑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도 이른바 '묻지 마' 투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확고한 경우에는, 누가 후보이든 간에 무조건 그 당 깃발만 들고 나오면 표를 준다는 것이다. 후보의 정책이나 소신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대개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적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일하셨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 아버지 역시 언제나 기호 1번만 찍던 '골수 여당분자'였다.

나중에 머리 큰 자식들이 아버지의 그런 무소신(?) 여당 지지에 반기를 들고 뭐라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그게 소신이라며 언제나 여당만 지지하셨다. 어머니에게도 여당 지지를 강요하셨고…. 아마도 공무원들에 대한 과거 독재정권의 세뇌 탓이 아니었을까.

미국의 중간선거와 관련해 평소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는 미국인 교수에게도 질문을 던져보았다. 이곳 제임스메디슨 대학교(JMU)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단'에게 딸의 숙제이기도 한 내용을 이메일로 물어보았다.

다음은 단에게 던진 다섯 개의 질문이다.

1) 내일 투표를 하실 건가요?
2) 누구를 찍으실 건가요? 웹? 아니면 알렌?
3) 왜 그를 지지하나요?
4) 어느 정당을 지지하세요? 민주당? 아니면 공화당?
5) 당신 같은 지식인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이 있나요? 만약 없다면 왜 없는 거죠?


메일을 보내고 난 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단에게서 답장이 왔다. 단이 미국 지식인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국 지식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단의 대답을 이곳에 소개한다.

"부시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악이며 가장 멍청한 대통령"(밑줄 부분).
"부시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악이며 가장 멍청한 대통령"(밑줄 부분). ⓒ 한나영
1. 예, 화요일에 투표할 겁니다. 저는 항상 투표를 합니다.
2. 짐 웹을 찍을 겁니다. 조지 알렌은 반대합니다.
3. 저는 버지니아와 워싱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 알렌은 이곳 버지니아주의 터줏대감이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을 지냈고,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다. 2001년부터 현재까지 상원의원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번에 재선을 노리고 있다.)

알렌은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을 지지합니다. 알렌은 또한 레이시스트(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마카카' 발언 참고). 그리고 알렌은 고문과 인신(人身) 보호 영장(habeas corpus)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지지해왔습니다.

(주 : '마카카'란 짧은 꼬리 원숭이를 뜻하는 말이다. 조지 알렌은 이번 선거 유세 기간 중에 경쟁자인 민주당 후보 제임스 웹의 선거운동원인 인도계 미국인인 버지니아대학교(UVA) 학생을 가리켜 "마카카"라고 불렀다. 유색인종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며 이 때문에 알렌은 '레이시스트'라 불리기도 했다.)

인도계 미국인인 상대편 선거운동원을 원숭이(마카카)라고 불러 '레이시스트'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공화당 후보 알렌.
인도계 미국인인 상대편 선거운동원을 원숭이(마카카)라고 불러 '레이시스트'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공화당 후보 알렌. ⓒ CNN 인터넷판 화면 갈무리
알렌의 유일한 생각은 '결혼개정안' 뿐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동성간 결혼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과장되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결혼 개정안에 찬성한다면 YES에 한 표를. 'One Man, One Woman.'
결혼 개정안에 찬성한다면 YES에 한 표를. 'One Man, One Woman.' ⓒ 한나영
(주 : 버지니아주는 동성 간 결혼을 금지하는 내용의 주 헌법개정안을 이번 중간선거 투표에 붙였다. 결혼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현재의 법 조항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만을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하겠다는 법안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주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앞으로 버지니아주에서 동성 간 결혼은 무효가 된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악의 대통령이고 가장 멍청한 대통령이라고 생각되는 조지 부시를 지지하는 사람에 반대해 저는 투표를 할 것입니다.

4. 저는 정당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투표를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시가 백악관에 있는 동안엔 늘 민주당을 지지해왔습니다.

5. 대부분의 교수들은 저처럼 진보적으로 생각합니다. 저를 지식인이라고 불러줘서 고마운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겐 지식이 좀 있을 뿐이고, 저는 여행과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사람을 고문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번 중간선거에 임하는 한 미국 지식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물론 스스로 메일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이곳에서 만난 많은 상식 있는 사람들은 이라크 전쟁과, 희생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점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어떻게 표로 연결되고 심판의 날을 세우게 될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변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투표에 참여하고 선거 운동을 벌이는 것만은 감동적이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정치 혐오증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 투표에 열심히 참여하여 원치 않는 제도, 원치 않는 사람의 당선을 방조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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