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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엔 '반공'이 흘러넘쳤다.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 반공 투사…. 학교에선 주기적으로 반공영화 관람 행사를 열었다.(우리나라 반공영화를 많이 봤는데 기억나진 않고, 유일하게 외화 <킬링필드>가 기억난다.) 수시로 등화관제 훈련이 열려 암흑 속 체험을 하곤 했다. 그럴 땐 모든 불을 끄고 촛불을 찾아야 했는데, 촛불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어둠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교문에선 항상 배지 검사를 했다. 배지를 안 달고 오면 미리 들어간 친구들이 담 너머로 던져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걸리면 두 배로 벌을 받았다.

그 시절엔 쥐가 무척 많았다. 밤에 누우면 다락방 위로 쥐가 달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저러다 '툭' 바닥으로 털어지진 않을까 공포에 떨며 잠에 들고 했다. 그런 쥐에 대항해서 사람들은 '쥐 잡는 날'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쥐 잡자는 표어를 붙이고 다니고, 온 동네에선 쥐약을 풀고 대대적으로 쥐를 잡았다. 그런 다음날 아침이면 약 먹고 비실비실하는 쥐를 쓰레받기에 담아 나온 뒤 연탄집게로 마지막 목숨을 끊어놓던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


▲ 이형덕 기자(필명 이시백)가 최근 두 번째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를 펴냈다.
ⓒ 심은식
그 시절을 다시 만났다. 이시백(기자명 이형덕)의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는 1970년대를 고스란히 2006년에 재현해냈다. 책을 읽는 동안 수시로 키득키득 웃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따금 씁쓸한 느낌에 빠져 책장을 덮기도 했다. 새마을 운동의 함성이 가득했던 1970년대를 작가 이시백은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냈다.

이시백의 자유단편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를 읽으면서 뱀 장수를 떠올렸다. 한때 저자거리의 스타였던 뱀 장수는 빼어난 입담으로 좌중을 들어올렸다 놓곤 했다. 흔히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로 시작하고 했던 그네들 중엔 팔도사투리를 구사하는 기발한 재주를 갖고 있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박자를 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어느새 흠뻑 그 속에 빠지곤 했다.

이시백이 그랬다. "햇볕정책유? 어디 그 쪽에는 해가 안 뜬대유"라고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다가 어느새 "기리니끼니, 운동의 량은, 질량의 속도가 작용해서리"라고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쇳소리가 섞인 듯한 경상도 사투리와("니 귀때기는 우예 생기묵길래, 사람 말을 그리 몬 알아 듣노?) 전라도 사투리("오매, 징혀라....그려, 오늘 아조 어떤 놈의 노래가 진짠지, 뿌리를 뽑드라고잉")가 어우러지기도 한다.

농담 실력도 뛰어나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제목을 한자로 만들어내고((險世爲橋(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盧空手 婦人(Mrs.Robinson)), 옛 안기부 모토를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 쪽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고 비꼰다. 죽지 않는 비법을 알려준다면서 제자들에게 '계속 숨을 쉬라'고 말하는 스승의 말을 '선현의 말씀'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일종의 농담이다. '엄숙한 것들의 무덤 앞에서'라고 책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는 굳이 무게 잡지 않는다.

잘난 사람도 알고 보면 못난 사람들

▲ 책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 삶이보이는창
게다가 호기심 가질 만한 소재들을 고르고 골라 곶감 엮듯이 이야기를 풀어가니 이야기가 술술 넘어간다. 장영철의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한 마디로 프로레슬링 인기가 떨어지던 시기를 비롯, 어깨 문신을 한 사람이면 벌벌 떨던 삼청교육대 사건, 때만 되면 촛불 찾느라 법석을 떨던 등화관제훈련, 김일성에게 보내는 주파수라는 얼토당토 앉은 의심을 받았던 가수 김추자 등 <890만번...>을 보면 1970년대가 한 편의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흑백TV같은 추억 속에 '폭' 빠지게 된다.

책 속엔 1970-1980년대 대형 사건들이 흘러넘친다. 당연히 그 시대를 꼬집겠거니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시백은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애써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우리네 비루한 일상을 툭 던져놓고, 정말 비루한 게 뭐냐고 질문하는 식이다.

1970년 3공화국 정부의 부도덕성을 보여줬던 정인숙 사건을 말하기 위해 그는 뒷골목 건달패들의 윤간을 앞세운다.

"짐승도 제 자식은 버리지 않으며, 뒷골목의 건달마저도 제 짝이 될 여자의 몸을 함부로 내돌리지 않는데, 지엄 존자를 필두로 나라의 내로라하는 무려 스물여섯의 세도가들이 한 여자를 번갈아 돌아가며 몸을 뒤섞으니, 뒷골목 건달패들이 돌림빵이라 부르는 이 해괴한 짓을 그들은 무어라 부르며 즐겼는지..."

비유를 통해 정부 실력자들을 뒷골목 건달패보다 못한 이들로 끌어내린다. 학교와 군대가 별 차이 없던 포악한 시절을 묘사할 때도, 그는 '베컴의 꽁지머리보다 우리가 더 빠르다'며 '킬킬'거린다.

"한동안 닭 볏처럼 옆머리는 말끔히 깎은 채, 윗머리만 길게 기르는 펑크머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축구스타인 베컴도 한때 그런 머리를 한 적이 있고... 그런데 이 묘한 머리의 효시가 바로 대한민국임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더라."

온갖 사투리가 걸쭉하게 넘치고, 역사와 정치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니 <890만번...>은 큰 부담이 없다. 어렵지 않게 읽힌다. 쉽게 읽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편하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못난 사람들이다.

정말 가진 것 없이 못난 사람들도 있지만,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못난 것은 마찬가지다. 한 치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김 대위가 졸지에 '바보'가 돼서 연병장을 돌고, 저명한 국문학 교수가 오리와 개의 붙임말인 '오리개'를 마을 이름으로 알고 자랑한 게 대표적이다. 일자무식인 10대 노동자가 온갖 이론으로 무장한 대학생을 당황케 하는 것처럼, 잘난 사람도 이시백의 눈으로 보면 '헛똑똑이'일 뿐이다.

행복의 조건, 현실의 틀에서 벗어나기

▲ 이형덕 기자
ⓒ 심은식
결국 <890만번....>을 읽다 보면 저자가 누군가를 소리 높여 꾸짖으려는 의도로 책을 쓴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강하다. 그런 저자의 모습은 김 대리를 통해 잘 드러난다. 대기업에 다니던 김 대리는 구조조정 바람이 심하던 때 자진해서 사표를 던진다. 그리고 산골에 들어간다. 1년만에 돌아온 그는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옛 동료들을 만난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뭐냐?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 그것이 행복이고 인생의 바른 길이다. 죽어라고 일해서 돈을 천정까지 쌓아 두면 뭐하랴. 돈 쓸 시간마저 없을 지경으로 새벽부터 야밤까지 일에 파묻혀 지내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아침나절 텃밭에 나가 상추를 심다가, 배가 고프면 코앞에 흐르는 개울 바닥에서 가재를 잡아 국수에 끓여 먹고, 달 밝은 밤이면 머루로 담근 술에 얼큰히 취하며 마당에 내려앉는 산벚 꽃잎을 바라본다는 김 대리의 이야기에 빠져 넋을 놓고 듣던 이들은...."-P264

동료들은 김 대리의 말에 혹해 당장 사표를 던지겠다고 맹세하지만, 누구도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 이시백은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박정희의 폭압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그 시대 잔재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890만번....>은 주 배경이 1970년대지만, 1960, 1980년대 풍경도 일부 엿볼 수 있다. 1968년 일어난 김신조 일당 청와대 습격 사건을 비롯 이중간첩 이수근 처형(1969년), 평화의 댐 성금 기부행사(1986년), 88서울올림픽(1988년)까지 등장한다.

자유단편 소설집이란 이름이 붙은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는 이시백이 1990년 <메두사의 사슬>이란 장편소설을 발표한 이후 무려 17년만에 나온 소설집이다. 지난해 5월 오마이뉴스에 '손바닥 소설'이란 이름으로 연재한 단편소설 중 일부가 책에 담겼다. 책 제목이기도 한 <890만번....>도 당시 오마이뉴스에 소개됐다. 참고로 이시백은 시민기자 이형덕이다.

책을 낸 출판사인 '삶이 보이는 창'은 1998년 6월 서울 구로 지역에서 일하던 활동가들이 뭉쳐 만든 곳이다. <황금이삭>(안재성), <노동의 불복종> <진보정치를 위하여>(허영구), <말해요, 찬드라>(이란주),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박성훈) 등 이른바 잘 안 팔리는(?) 책만 골라서 내는 곳이다.

출판사에 대해선 할 말이 없지만 제목은 솔직히 불만이다. 쉽게 와 닿지 않고 재미가 약하다. 단편을 읽고서야 이해할 수 있는 제목이다. 오히려 '나의 트로트 시대' '한국 조폭 영화 소고' '안녕하세요 하나님'과 같은 제목이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행복'이다. 언젠가 그가 한 인터뷰 자리에서 '불편함이 곧 즐거움'이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리고 '돈과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꺼낸 비유가 떠오른다. 그 비유는 다음과 같았다.

"한 사람은 농사꾼으로 대형 승용차를 두 대나 운영합니다. 그러나 항상 빚에 쪼들리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시골 화가로 월수입이 30만 원 안팎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항상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하, 돈이 여유를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여유를 주는 게 아닐까요?"

890만 번 주사위 던지기 - 이시백 자유단편 소설집

이시백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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