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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연방준비은행 앞을 지나가는 행인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 <데일리텔레그래프> 인터넷 판
호주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Reserve Bank of Australia)은 11월 8일 오전,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인상했다. 이번 금리인상은 2006년에 들어서만 세 번째로, 그 결과 호주의 기준금리는 지난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6.25%가 됐다.

최근 한국은행이 부동산가격 상승과 연계하여 금리인상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 못지않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단호하게 금리인상을 단행한 호주중앙은행의 사례를 살펴본다.

2002년 이후 8차례 금리인상

글렌 스티븐슨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미리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서 "금리인상의 여파로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2006년 예상목표치인 3%를 초과하는 인플레이션 상승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고 금리인상 이유를 밝혔다.

이번 금리인상은 물가앙등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을 잡기위한 조치였지만 가뜩이나 침체국면에 들어간 호주 부동산시장에 큰 악재로 작용했다. 개점휴업상태의 부동산시장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것.

한국에 버금가는 부동산투기 열풍에 몸살을 앓았던 호주는 2002년 이후, 무려 8차례나 금리인상을 단행한 연방준비은행의 강력한 맞대응으로 약 2년 전부터 진정국면에 들어섰다. 호주의 일부 경제학자들은 '부동산가격과 금리의 상관관계'를 확연하게 보여준 사례로 꼽고 있다.

호주국영 abc-TV의 보도에 의하면, 지역에 따라서 큰 편차를 보이고 있지만 부동산가격이 지난 2년 동안 약 20% 정도 하락한 것으로 집계된 것. 이렇듯 호주의 부동산거품이 걷히면서, 높은 가격으로 주택을 구입한 선의의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더욱이 부동산구입예산의 90% 이상을 은행대출에 의존한 경우의 주택소유자는 채무불이행(디폴트)으로 집을 잃거나, 부동산 가치보다 은행부채가 더 많은 '깡통주택'의 상태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다.

2006년 들어서 부쩍 늘어난 채무불이행자의 주택을 압류하기 위해서 법적조치를 취하고 있는 ANZ은행의 크레이그 타운젠드씨는 채널7의 <투데이 투나잇>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3-4년 전부터 전문가들의 강력한 경고가 있었다"면서 "그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고객들과 실랑이를 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 맥도널드 햄버거처럼 특색 없이 지어 '빅맥 하우스'라고 불리는 주택단지. '부동산 붐의 사생아'라고 비난받는 주택형태로 정원이 거의 없다.
ⓒ 윤여문
낮은 이자율로 폭등한 부동산 높은 이자율로 폭락

호주는 한반도의 35배나 되는 드넓은 땅에 2천만 명을 약간 웃도는 적은 인구가 살고 있다. 1평방킬로미터에 두 명 정도가 살 정도로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는 호주에서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경제전문가들은 호주부동산이 폭등한 가장 큰 이유를 다음 두 가지에서 찾는다. 호주인구의 약 95%가 인구 2만 명 이상의 도시에 몰려서 살고 있는 현실과 연방준비은행이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에 따라 오랫동안 채택한 낮은 이자율 정책.

자유방임에 가까운 시장 메커니즘(market mechanism)에 부동산시장을 방치해버린 집권보수정당인 자유-국민 연립정부도 책임의 일단을 면할 수 없다. 존 하워드 정부는 첫 주택구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부동산시장 활성화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삼은 혐의가 짙다.

금리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연방준비은행 또한 부동산가격이 수직상승하는 상황에서 2001년 한 해에만 여섯 차례에 걸쳐 6.25%이던 기준금리를 4.25%로 인하해서 가뜩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주택시장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호주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시드니 북서부의 경우 부동산 가격이 바닥을 쳤던 1996년과 최고치를 기록한 2003년을 비교해 보면 무려 4배나 차이가 난다. 이런 현상을 두고 호주독립연구소의 피터 손더스 연구원은 "주택이 주거공간이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암흑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1986년부터 2004년 사이에 주택가격이 무려 310%나 급등했는데, 같은 기간 동안 봉급생활자의 급여는 128% 상승에 그쳤다"다면서 "호주노동자들의 노동의욕과 저축의지를 저하시키는 약탈적 자본주의 속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낮은 이자율에 힘입어서 10년 이상 이어진 호주 부동산 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자율이 인상되면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손해의 대부분을 '상투를 잡은 서민들'이 고스란히 안고 있다.

▲ 존 하워드 총리를 거짓말쟁이로 묘사한 그래프.
ⓒ 호주노동당 홈페이지
거짓말쟁이가 된 존 하워드 총리

존 하워드 총리가 부동산정책을 선거 전략에 이용한 사실은 지금도 크게 비판받고 있다. 그는 2004년 10월 총선 당시,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이자율 네거티브 캠페인을 통해서 승리했다.

선거기간 내내 "노동당이 집권하면 이자율이 오른다, 자유-국민 연립당이 계속 집권해야 낮은 이자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공약을 반복해서 거액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유권자들을 회유했다. 그러나 존 하워드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이자율이 네 번에나 올라서 영락없는 거짓말쟁이가 됐다.

그 당시 연방준비은행 총재였던 이안 맥팔레인씨는 최근 TV에 출연해서 "연방준비은행은 정부로터 독립된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이자율에 관해서 아무런 권한도 없는 하워드 총리가 오직 재집권을 위해서 사실과 다른 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야당인 노동당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요즘 연방노동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존 하워드 총리의 옆모습이 등장하고, 2002년부터 7차례 이자가 오른 자료와 함께 그의 코가 자꾸 길어지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번에 이자가 한 번 더 올랐으니 조만간 그의 코가 더 길어질 것이다.

존 하워드 총리는 8일 오후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나도 금리인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한 셈이 됐고, 그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호주의 경제는 여전히 강세"라고 강변했다.

특히 팀 코스텔로 재무장관도 "OECD국가 중에서 호주만큼 경제가 좋은 나라는 없다, 다만 휘발유 가격의 폭등과 가뭄으로 인한 식품가격 앙등으로 제3분기 물가상승률이 3.9%에 육박해 금리인상의 요인이 됐다"고 해명했다.

▲ 한 동양계 호주인이 매물로 나온 주택광고판을 바라보고 있다.
ⓒ 윤여문
호주 연방준비은행의 뚝심

호주 연방준비은행은 금리인상을 단행하기 약 열흘 전부터 금리인상의 가능성을 예고했다. 호주의 지하자원 붐이 예상 밖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사상최저치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 경제가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어, 금리인상으로 인한 경기침체를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그러나 피터 코스텔로 연방 재무장관은 의회 보고를 통해서 "지난 4년간 호주 경제의 축을 이루면서 단단히 한 몫을 한 자원호황이 끝나가고 있다"면서 "곧 호주경제가 침체국면에 들어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금리인상을 저지하기 위한 발언은 농민들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자임하는 국민당에서도 나왔다. 마크 베일 국민당 당수가 "사상최악의 가뭄피해를 겪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서 당분간 금리인상을 하지 말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가한 것.

그는 이어서 "가뭄으로 파산지경에 이른 농민들이 4일에 한 명 꼴로 자살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읍소작전도 곁들였다. 일부 농민대표들은 연방준비은행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호주경제의 근간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가능성이 있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연방준비은행의 의지는 견고했다. 아울러 언제 꿈틀거릴지 모를 부동산시장의 준동을 사전에 막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결국 11월 8일 오전, 집권당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금리인상은 단행됐다. 같은 날 오후, 존 하워드 총리는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선거공약을 지키지 못해 유감"이라는 사과와 함께 "연방준비은행의 금리인상 조치를 존중한다"는 원론적인 발언을 해야 했다.

8일 저녁, abc-TV에 출연한 스티브 킨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금리인상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한국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와 기업의 전방위적인 로비와 부담스런 간청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금리인상을 단행한 연방준비은행에 대한 믿음이 크다. 각 정당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유한하지만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한(unlimited)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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