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유권자센터는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욕과 뉴저지 두 군데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시민권을 가진 한인을 상대로 유권자 등록을 하도록 유도하고 투표에 참여하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현재 뉴욕과 뉴저지 합쳐서 13,000명 정도의 한인을 등록시킨 센터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그 영향력을 만만치 않게 발휘했다.
40대의 젊은 흑인으로 다음 대선에서 힐러리를 위협하며 민주당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는 오바마가 센터의 김동석 소장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당연히 뉴저지에서 출마하는 상하원 후보들이 모두 이 센터를 무시하지 못했다.
뉴욕시나 뉴저지주의 경우 주의원들이나 시장 후보들은 한인유권자센터를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여기엔 조직될 가능성이 높은 '표'가 있기 때문이다. 김 소장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영향력을 갖게 된 시점은 2년 전부터라고 한다.
사무실 상근자는 뉴욕에 1인, 파트타임 1인, 뉴저지에는 이사장이 직접 상근하고 있다. 실무 인력이 거의 없는 만큼 두 군데 모두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중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내가 사무실을 방문한 날이 선거일 전날이었는데, 그 날 저녁에도 자원봉사자들이 투표참여 전화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결집된 힘으로 김 소장은 워싱턴 정가에 한인 조직의 존재 이유를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현재 한인유권자센터가 집중하고 있는 일은 미국과 한국간의 비자면제협정, 북핵 문제에 대한 평화·외교적 노력 촉구, 미 의회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결의안 채택 등이다.
한인 유권자 조직을 워싱턴의 정치인들에게 인식시키고, 그들에게 유권자의 뜻을 경청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에게는 말하자면 한국이라는 국가의 정식적인 요청 사항, 즉 외교문제가 아니라 국내 정치문제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인 유권자운동은 '민간외교역'
얼마 전에는 뉴욕을 다녀오다가 버스에서 내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이 한인이었다. 그에게 다른 한인이 인사를 하자 "시민권이 있냐"고 물었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답변하자 그는 "반드시 투표하라"고 권했다. 뉴욕의 한인들이 거주 인구에 비해 영향력이 없는 것은 투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인유권자센터는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구성된 조직이다.
김 소장은 자신들의 롤모델로 유대인들의 조직을 들었다. 일상생활에서는 각종 자원활동과 환경운동 등을 전개하며 시민사회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지역 내 정치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워싱턴에 있는 그들의 로비단체는 미국의 이스라엘 외교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인유권자센터는 일상적으로 한인 시민권자들을 조사하고, 이들을 유권자 명부에 등록시키는 한편, 투표에 실제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일을 한다. 이들은 또 이렇게 조직된 사람들을 각종 문화학교나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센터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센터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활동은 뉴욕이나 뉴저지에서의 한인들의 영향력을 높여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뉴저지, 버겐카운티의 경우 의회에서 올해부터 선거에 한국어 서비스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센터의 요청에 의회가 응답한 것이다. 김 소장은 이를 통해 한인들의 참여가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속의 '마이너리티' 한인들... 이젠 한반도 정책 '압박'
김 소장이 이 일을 시작한 것은 92년 LA 폭동 이후다. 자신이 보기에 한인이 피해자인데, 피해자가 피해자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뉴욕, 뉴저지, 시카고, LA 등의 한인 모임과 의논해 이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13년이 지난 지금 여러 어려움 때문에 결국 뉴욕과 뉴저지만 남았지만 13년 운동의 성과가 이제야 나타나는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인 한인들은 '표'로 인식된 적이 없었다. 일정하게 소외된 그룹들이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하듯, 한인 지역을 중심으로 세금 또박또박 내면서도 별 의견 없이 간섭받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LA 폭동은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고, 최근의 이민법 문제는 그런 점에서 소수민족의 소외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실제로 최근 미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이민법 시위에는 히스패닉을 비롯한 이민자들이 중심이지만 일부 한인들도 이들 소수민족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들을 히스패닉과 구별해온 지금까지의 한인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뉴스쿨(NEW SCHOOL)에서 이주자 문제를 연구하는 이충훈씨에 따르면 많은 한인들은 과거 인종차별 의도가 뚜렷한 캘리포니아 주민발의안(인종, 국적별로 주민관련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불법체류자들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과 공적 서비스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로만 하자는 캠페인에 찬성했다고 한다.
한인 조직, 영향력 구축 시작
하여간, 지금까지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특별한 영향력이 없다고 본 한인들이 미국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일정한 영향력을 구축하기 시작한 셈이다. 내년에는 한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LA에 조직을 만드는 것이 센터의 최대 목표라고 한다.
어느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유권자등록운동이라는 '참여'운동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한 센터가 워싱턴 정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미국내 한인의 이해뿐 아니라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 소장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정부의 외교 노력 중 무엇이 포함돼야 하는 지를 시사해 주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이같은 움직임을 고려치 않는 한국정부의 외교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9·11 이후 이민자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적지 않다. 학자들 중에서도 헌팅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고 이민법 문제도 그런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민주당의 선거승리로 이민자 정책에 대한 변화가 예상된다. 하지만 애초에 미국에 정착했던 앵글로 아메리칸들이 보기엔 소수민족들은 미국에 살면서 미국을 만들어 가기보다 자신들의 출신 조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민법 문제에서도 드러났지만 이로 인한 미국의 정체성 문제의 논란은 점점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인유권자센터의 활동은 결국 이 같은 미국의 변화에 조응하여 소수민족으로서 한인이 미국사회에서 차별 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자구책인 셈이다. 특히 최근들어 한인유권자센터와 같은 조직들이 조금씩 그 실제적인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는 것은 미국내 한인 사회가 과거와 다른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