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24절기를 알고 있는가? 봄(春)의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여름(夏)의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가을(秋)의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겨울(冬)의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이름들이다. 이러한 절기의 변화는 우리 선조들이 읽어낸 우주의 질서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김풍기 교수가 24절기에 마음을 얹고 있는 한시 묶음 책을 펴냈다. <삼라만상을 열치다>(푸르메,2006)가 그것이다. 24절기에 걸친 우주 자연의 운행을 담은 주옥같은 한시 작품들을 골라 엮고, 작품 해설과 절기에 얽힌 필자의 마음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저자 김풍기는 '자연의 순행에 맞는 몸의 변화를 꿈꾸며' 라는 글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책을 펴내는 변(辯)을 말하고 있다.
"거대한 우주에 우리 삶의 뿌리를 튼실히 박고 살아가던 시절에는 우리 몸 역시 절기의 변화에 반응하여 바뀌었다. 어느새 절기를 잊고 사는 우리는 이제 우주에 뿌리박은 우리 몸을 잊어버렸다. 거대한 인간은 그렇게 왜소해졌고, 우주와 호흡하던 성스러운 인간은 그렇게 비속해졌다. 시계 바늘의 움직임에 부산을 떨고 달력의 숫자에 의해 생활이 지배된다, 그러고 보니 참 슬프기 그지없는 삶이다.-(중략)-우주의 중심에서 그 운행을 살피는 일은 내 몸을 돌아보는 일과 같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내 공부가 우주의 변화에서 어긋나고, 종국에는 내 몸의 변화에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수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어 그것이 우주의 질서에 어긋난 세상을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우주를 마주할 수 있는 눈을 길러주신 삼라만상과 공부 길의 스승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가을(秋)의 한로(寒露) 부분의 한 쪽을 인용해 본다.
'시은(市隱)' 이라는 말이 있다. <진서(晉書)> '유찬전(劉粲傳)'에 나오는 말이다. '은거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조정에도 숨을 수가 있고 저잣거리에도 숨을 수가 있다. 은거란 애초에 내 마음에 달린 것이지 외부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진정 은거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굳이 속세를 피해서 숨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도연명이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 사는 마음에 초가집 얽었지만 結蘆在人境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 없지요. 而無車馬喧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소? 問君何能爾
마음은 멀고 땅은 치우쳐 있기 때문이라오. 心遠地自偏
동쪽 울 밑에서 국화 따다가 採菊東籬下
유연히 남산을 바라봅니다. 悠然見南山
산 기운은 저물녘이라 아름답고 山氣日夕佳
날새들은 서로 함께 돌아오네요. 飛鳥相與還
이 가운데 참된 뜻 들어있나니 此中有眞意
분별하고 싶지만 이미 말을 잊었다오. 欲辨已妄
-도연명, '음주이십수' 중 제5수, <도연명집>
도연명의 시중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의 '음주(飮酒)' 연작시는 각 편마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데, 특히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진 것은 5∼6구 때문이다. 이 구절은 조선 후기 여러 화가들의 화의(畵意)를 촉발시키면서 그림으로도 자주 표현되기도 했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남산을 '유연(悠然)히' 바라본다는 것은 언어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지점을 가진다. '유연'이라는 표현 속에는 도연명 자신의 직관적 감흥과 세계를 단박에 파악하는 시선, 삶의 태도가 동시에 들어있다. 한가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도 있고, 동시에 세속 번우한 일을 모두 떠나서 고요한 시선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도 느껴진다.
또한 그 말속에서는 시공을 넘어서 온 우주에 혼자 우뚝 서서 관조하는 듯한 장대한 스케일도 느껴진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 구절이 주는 느낌은 너무도 다양하고 창조적이라서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어쩌면 절망과 경탄을 동시에 발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은거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마을에 살지만 마음이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게 바로 은거가 아니겠는가. 마음이 진정한 은거의 열쇠라면, 내가 사는 곳이 저잣거리면 어떻고 산 속이면 어떻고 조정의 한 귀퉁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비로소 저물녘의 아름다운 산 기운을 볼 수 있고 새들이 무리 지어 둥지로 돌아오는 것 안에서 우주의 참된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를 넘어선 경지, 그것은 우주와 통하는 인간의 마음으로만 간취할 수 있다. 욕심 가득한 중생이 언감생심 엿볼 것이겠는가.
욕망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원동력이라면 동시에 삶을 파괴하는 힘도 욕망에서 비롯된다. 힘에 부치는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얼마나 힘들고 모진 곳인가. 아무리 내 삶에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자고 다짐해도, 어느새 나는 그 무게에 허덕이며 바쁜 일상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이 어쩌면 그 짐을 벗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무거운 짐을 내리는 바로 그 자리가 나의 은거지가 될 것이다.
이 책에는 도연명, 구양수, 두보 등의 중국 시인들과 이규보, 이달, 정약용 등의 우리나라 시인들의 한시 80여 편이 저자 김풍기 교수의 작품 해설과 에세이 속에 보석처럼 담겨져 있다. 저자의 전문적이고 높은 안목으로 선별한 계절과 절기에 어울리는 서경과 서정을 노래한 한시를 읽는 것은 은근한 기쁨을 맛보게 한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한시와 저자의 산문으로 엮고 있는 이 책은 삭막한 세파에 찌들린 현대인에게는 한 그릇의 감로수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