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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산시 고북면 고북초등학교에서 열린 명창 고수관 학술세미나
17일 서산시 고북면 고북초등학교에서 열린 명창 고수관 학술세미나 ⓒ 안서순
세월은 흔적을 삭힌다. 지난 3월 이후 10달여만인 11월17일 다시 찾은 '고수관'의 흔적은 더 흐려져 있었다. 그가 소리공부를 하며 마셨다는 꽃장샘터는 가을가뭄으로 말라있는데다 지난 장마때 밀려 내려온 자갈로 거의 메워져 있었고 그의 무덤자리는 이제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나무와 억새로 뒤덮여 있었다.

고향마을에 흐릿한 전설 토막만 남겨놓고 떠난 그를 어디에서 찾을까. 그의 고향인 충남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올 봄부터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가 말년을 의탁했다는 공주에서부터 판소리 박물관이 있는 전북 고창까지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가 남긴 자취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명창 고수관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17일 서산시 고북면 고북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이 세미나에는 유영대 교수(고려대학교. 국립창극단장)와 향토사학자인 이은우씨가 '명창 고수관에 대해 연구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고수관의 출생연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고수관의 생몰연대는 미상으로 알려져 있고 가족에 대한 말은 있지 않았다.

장마로 메워지고 가뭄으로 말라버린 꽃샘터
장마로 메워지고 가뭄으로 말라버린 꽃샘터 ⓒ 안서순
유교수는 "지금까지 생몰연대 미상으로 알려지고 있는 고수관의 출생연대는 영조 헌종대의 문신으로 예술과 등과 교유가 많았던 신위(申緯 1769-1845)가 75세 된 해인1843년 고수관에게 고수관 팔십지년 연극유 능석시성조 임별유시(高壽寬 八十之年 演劇猶 能昔詩聲調 臨別有詩)라고 써준 시제의 '팔십'이 정확하다면 고수관의 출생연대는 1764년이 된다고 추론했다.

또한 판소리 연구가인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의 기록에 따르면 고수관은 순조와 헌종,철종에 걸친 1800년부터 1863년까지 활동했다고 한 것을 볼 때 그는 최소 1849년까지는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신위와 정노식의 기록이 맞는다면 고수관은 1764년에 나서 팔십 이상을 살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위가 '1840년 3월 고수관이 홍성에서 왔다(공주로)고 기록한 부분이 있어 '홍성에서 살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는 공주에서 살았다는 말만 전해왔다.

이제 어디쯤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고수관의 무덤자리
이제 어디쯤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고수관의 무덤자리 ⓒ 안서순
이은우씨는 "고수관의 고향인 초록리 노인들에 대한 채록을 한 결과 '노인들이 어릴때 고수관이 이 동네에서 나서 자기 혼자 꽃샘(花井)에서 물을 퍼먹어 가면서 수련을 해 목구멍에서 피가 세동이가 나오고 득음을 했다'는 말과 옛날에 '고석'이라고 하는 아들이 벌초를 하러(고수관의 묘에)다녔다는 말 등을 전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초록리 태생임이 분명하다고 발표했다.

그는 고수관이 살았다는 집에 대해서도 마을노인들은 띠옴팡집 꼬작집에서 살았다는 말이 전해온다는 것 등을 볼 때 고수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고 못 박았다.

명창 고수관 기념사업회의 김광조 회장은 "오늘 세미나를 통해 그간 막연하게 추측되던 고수관 선생의 출생연대가 밝혀지고 고석이라는 아들이 있어 벌초를 다녔다는 등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은 큰 성과다"며 "이후 보다 체계적이며 깊이 있게 연구해 선생이 생전에 쌓았던 명성을 다시 드러나 보이게 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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