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북한 핵문제는 향후 남북관계와 한반도정세의 중요한 변수다.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의 진전과 한반도 냉전해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대북 정책이다. 미국의 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북한 핵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북한 핵 실험은 미국의 자충수
이른바 북한 핵문제는 ‘북한발’이 아니라 ‘미국발’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사실 처음부터 우습게 시작됐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에 이어진 미 국무부의 북한이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시인했다”는 일방적 발표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이러한 주장을 미국의 날조라고까지 주장하며 한 번도 핵개발계획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다. 북한은 외무성 담화에서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농축 우라늄계획을 추진하여 조미기본합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걸고들면서”라고 하면서 미국을 반박했다.
다만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 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자신들의 언론과 외교관들을 통해, 미국의 일방적인 핵개발계획 발표가 날조된 것이라도 주장해 오고 있다.
당시 누구의 주장이 맞았던 것일까.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이 북한 핵개발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 어떤 구체적인 사실 설명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 당시 제임스 켈리 차관보는 한국에서의 기자회견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얼버무리면서 회피하기만 했다.
미국은 단지 언론을 통해 북한이 새로운 우라늄 농축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부품인 코발트 파우더와 6000시리즈 고강도 알루미늄합금을 수입했다는 것을 흘리고 있었지만, 6000시리즈 알루미늄합금은 의료기계 제작을 비롯해 민수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철공소에도 얼마든지 널려 있다. 또 미국은 똑같은 내용을 이라크의 핵개발 증거로 제시했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한바 있다. 결국 미국 언론을 통해 나온 이러한 증거는 핵개발의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더구나 북한이 정말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면, 봉인을 완료해 보관하고 있는 8천 여 개의 사용 후 연료봉을 개봉해, 재처리시설을 재가동하기만 하면 수개월내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우라늄 핵무기를 만들려면 고농축 우라늄이 50kg정도 필요하며, 이 정도의 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1,700여기의 원심분리기를 1년 동안 풀가동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굳이 적어도 10억 달러 이상이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시간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새로운 우라늄 농축시설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한 미국의 속내
이처럼 이번 북한 핵파문은 미국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일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부린 농간의 성격이 짙다. 그렇다면 미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한반도정세의 주도권을 재장악할 목적이었다. 미국의 “북한 핵개발시인” 발표가 터진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가 화해의 급물살을 타고 있었고, ‘신의주특별행정구역’ 발표 등 북한의 변화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만큼 대담했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북한방문 등 북일대화가 예상외로 빨리 진행되고 있는데 일종의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둘째, 공화당을 중심으로 주장해온 ‘제네바합의문 파기’의 목적이었다. 부시 행정부와 의회 내 강경파들은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제네바합의문’의 파기를 주장해 왔으나, 그동안 대내외적인 반대여론과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다가 명분을 찾은 것이었다.
셋째, 미국의 패권주의적 대외정책의 명분을 위해 ‘북한위협론’을 유지할 목적이었다. 이른바 ‘깡패국가들’ 가운데 미사일 개발 능력이 가장 뛰어난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MD(미사일방어)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명분에 제격이다. 또 중국봉쇄정책의 핵심요소인 북일동맹관계와 보조축인 한미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한 명분은 일단 ‘북한위협론’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라크에 대신할 새로운 ‘적’이 필요하며, 그 적합한 국가가 북한이기 때문이었다.
북한 핵문제의 본질은 미국의 NSA 위반
북한 핵문제의 본질은 미국의 ‘NSA(소극적 안보보장)’ 위반에 있다. 북한의 NPT 탈퇴선언과 불가침조약 체결 요구도 이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사실 북한의 NPT 탈퇴는 국제법 위반도, ‘죽을 죄’도 아니다. NPT 10조 1항에는 ‘자국의 최고이익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라고 판단될 경우 주권행사로서’ 탈퇴할 권리가 보장된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 5개국만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불평등조약이다. 어떤 국가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국가 주권사항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NPT에 가입하지 않은 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불평등조약이 존재하고, 또 어떤 국가가 핵무장을 포기하고 NPT체제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핵무기국가들이 해당 비핵무기국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겠다는 안보보장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소극적 안보보장’이라고 한다.
미국은 1994년 ‘제네바합의문’ 제3조 1항에서 북한에 대해 이 NSA를 문서로서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미국 국방부는 2002년 1월 8일 의회에 제출한 ‘핵태세보고서’에서 기존의 전략을 수정해 핵무기를 선제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잠재적 공격대상 국가로 북한을 비롯해 7개국을 거명해 ‘제네바합의문’에서 명시한 NSA 약속을 정면으로 깬 것이다. 이것이 북한핵문제의 본질이다.
핵 포기와 안정보장 맞교환이 유일한 해법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도 우리 국민들은 침착하고 우리 사회는 매우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일부 언론들이 제기하는 ‘안보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국민들이 북한 핵사태의 전말과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실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여론조사의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북한이 왜 핵실험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는지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보수언론들의 사실왜곡과 선동적 보도, 그리고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론조사 결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번 북한 핵실험은 북한의 군사모험주의와 미국 부시행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이 정면충돌한 결과다. 핵실험을 통해 국제사회의 핵비확산체제를 위협한 북한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책임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정책에 있다.
협상을 통한 해결을 거부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해온 미국의 ‘벼랑끝 몰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 부시 행정부 매파들에 일방적으로 동조하면서 대북강경론을 부추겨온 국내 보수세력들과 언론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억제력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일부 진보진영의 시각도 옳지 않다.
북한의 핵무기를 포기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아직도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북한의 핵무기 포기와 미국의 북한체제 안전보장을 맞바꾸는 것이다. 미국은 지금이라도 진지한 자세로 양자협상에 임해야 한다. 그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와 월간 <인권연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