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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어람미디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네루다, 마르케스, 옥타비오 파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대문호다. 그러나 경쟁자이자 동료들이 차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동안 보르헤스는 멀찌감치 소외되어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와의 친분 관계가 번번이 보르헤스의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평소 노벨문학상에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곤 했지만 내심 노벨문학상에 대한 열망도 강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보르헤스는 끝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만약 보르헤스가 지금 살아 있다면 꿈에 그리던 노벨문학상을 품에 안지 않았을까?

보르헤스는 여러모로 신비감을 안겨 주는 작가다. 평생 동안 단편소설을 고집스럽게 추구한 것도 그렇고, 노벨문학상에 얽힌 애증의 개인사도 그렇고,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실명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그렇다(물론 실제로는 유전질환이 결정적 이유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보르헤스의 작품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바벨의 도서관>, <바빌론의 복권> 등 단편소설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보르헤스의 문장은 마치 마법사의 주문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아마도 보르헤스의 작품세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환상적 사실주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BRI@그래서인지 보르헤스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선 일종의 마니아 성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순간 그 강렬한 첫인상에 매혹되어 영원히 보르헤스의 포로가 되게 마련이니까.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이제 더 이상 보르헤스가 창작한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보르헤스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작품들은 더욱 희소성을 띌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가 미국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정리한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는 상당히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불과 30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당당히 세계문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미국문학을,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보르헤스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살펴보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이 책 안에는 300년에 걸친 미국문학사가 알차게 요약되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벤자민 프랭클린, 휘트먼, 호손, 에드거 앨런 포, 허먼 멜빌,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에머슨, 오 헨리, 헨리 제임스 등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SF의 시인'으로 불리는 레이 브래드버리처럼 비교적 생소한 작가들까지 아우르고 있어 수백 장이 넘는 두꺼운 미국문학사 책보다 더 촘촘하게 미국문학사를 아로새긴 느낌마저 든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보르헤스가 미국문학에 정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르헤스는 모든 시대와 장르에 걸쳐 미국문학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심지어 탐정소설, SF, 인디언들의 구전시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책에서 보르헤스는 프랑스의 비평가 발레리 라르보의 말을 인용해 미국문학의 문학사적 의의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중남미문학이 루벤 다리오와 루고네스 이후 스페인문학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미국문학은 영국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영어권을 넘어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쳐왔고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끼칠 것이다."

발레리의 말은 다음과 같은 보르헤스식 해설로 이어진다. "사실 성경식으로 이렇게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보들레르를 낳고,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자들을 낳고, 상징주의자들은 발레리를 낳았다라고. 또한 우리 시대의 모든 참여문학은 월트 휘트먼으로부터 나왔기에 휘트먼은 칼 샌드버그와 네루다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넘나듦의 문학사를 간명하게 정리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한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보르헤스'란 이름만으로도 기대와 설렘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은 그 기대와 설렘을 충족시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만약 아직 보르헤스를 접해 보지 않았다면 주저하지 말고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어보길 바란다. 그럼 보르헤스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 세상에 없지만 보르헤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귓가를 간질이며 마법의 주문을 들려주고 있다.

보르헤스가 그 신비하고 음침한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순간, 보르헤스를 읽고 있는 당신은 마법의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수효만 늘리는 불길한 거울' 속으로.

덧붙이는 글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청어람미디어, 2006, 김홍근 옮김. 가격 12000원.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 초기의 작가들에서 20세기 SF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청어람미디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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