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생활한 지 이제 석달. 이 짧은 기간은 주로 1년동안 여기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갖추는 시간이었다. 집 구하기, 아이 학교 보내기, 신분증명을 겸하기도 하는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은행에 계좌를 열고, 인터넷과 전화·전기 신청하기, 학교에 등록하고, 자동차 구하고 등록하기 등이다.
한인이 많은 뉴욕 인근, 뉴저지 지역의 특성상 은행처럼 아예 한국인을 주요한 고객으로 삼는 곳이 있기 때문에 언어 장벽이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소통의 어려움과 문화 환경의 차이로 인해 서럽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일도 적지 않다.
바꾸어 생각하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도 이런 일을 통상적으로 겪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와는 달리 그들은 고통에 가까운 어려움을 겪으리라. 어쨌든 이런 감정 한편으로 미국의 공적 서비스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 한가지 사례이기 때문에 보편화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흠...쉽게 되겠구나"...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1달여 만에 이런 저런 준비들을 마쳤지만 문제는 자동차와 관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국제면허가 있고,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도 있고, 신분도 확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기시험은 면제를 해준다기에 '흠... 쉽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과정은 소위 '장난'이 아니었다.
면허 취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서류가 있는데, 처음 안내데스크에 가면 이 서류들을 검토하고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확인한다. 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내 비자 관련 서류에 체류기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서류가 있을리 있나? 당신들 나라의 공신력있는 대학이 발행한 서류인데…. 내가 찾아서 확인해주어도 'NO, NO'만 연발하면서 안된단다.
여권에 기재된 비자도 보여주었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상관인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에게 가서 물어본다. 그 사람이 서류를 들여다보며 뭐라고 하자, 돌아와서는 서류에 글씨가 너무 작아서 문제였다나…. 허-참. 하여간 통과!
그러면 서류점검이 끝난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까지의 절차는 말하자면 '입장'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식으로 면허를 취득하기 위한 서류를 접수시키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점검, 시험비용을 내는 곳에서 두 번, 시험 보는 곳에서 두 번, 면허 발급받는 곳에서 한 번.
그렇다면, 이들이 각기 다른 건물에서 일하는 것이냐? 아니다. 한 건물 안에서, 그것도 방으로 다 칸막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신청인의 똑같은 업무를 보는 사람마다 새로 검토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다.
전자식으로 한 번 등록하면 확인이 될 일인데, 업무를 보는 사람마다 검토하고 사람에 따라 서류미비를 지적하는 내용도 조금씩 차이가 있으니(내 경우는 그냥 다 통과는 되었지만),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미국 사람들은 이런데 익숙한 지 불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종의 공공서비스이고, 그 서비스의 질이 내가 보기엔 형편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문서 수정하면 안된다", "글자를 적게 썼다" "공증 다시 받아라"...
여하간 우여곡절 끝에 면허를 취득했고, 이제 차량보험과 자동차 등록 절차만 남았다. 자동차 소유권을 넘기는 문서에 전소유자의 서명을 받아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내가 기록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숫자 하나를 잘못 적어서 이를 수정한 상태의 문서를 들고 갔더니 "문서를 수정해서 안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전 소유자가 미국에 없어서 곤란하다'고 말하자 "그건 네 사정이고 문서를 재발급받아야 하니 그 사람이 오던가 공증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난 그때까지만도 차량 소유권문서니까 중요하게 취급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서 공증받은 문서를 다시 이곳에서 공증받아 갔더니 이번에는 전소유자의 운전면허증 사본이 없단다.
공증을 받아 오라는 이야기는 했지만 면허증 사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창구 직원이 말하지 않았다고 대꾸하니 자기네 문서에 필요한 서류로 되어 있는 문서를 보여준다. 결국 다시 서울로 연락해서 면허증 사본을 팩스로 받고 나서야 문서를 재발급받았다. 서울로 문서가 오가니 시간이 제법 걸릴 밖에…. 재발급받은 문서를 들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갔다.
그날 따라 다른 일로 좀 늦어서 오후 4시15분경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업무마감시간인 4시 30분을 불과 10여분 남겨놓은 상태에서 도착한 것이다. 준비된 서류를 디밀었더니, 이번에는 글자가 문제란다. 수정한 것도 아니고, 위조한 것도 아닌데, 안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짓, 몸짓을 섞어가면서 영어로 항의를 하고 있자니, 그 서류를 들고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면서 "이거 안되는 거지"라고 묻고 있다.
다른 직원들도 "물론 안되지"라고 대답한다. 아니 도대체 왜 안되냐? 그러니까 이번에는 글자가 'not good' 이란다.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겠지. 지가 돋보기로 보고 거기서 그런 흔적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아-, 그런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영어가 안되니까 사실 항의를 제대로 할 수없다. 그냥 소리만 높은 거지.
급기야 청원경찰이 달려와서, "야, 너! 안된다는 데 왜 그러고 있어! 가!"라면서 험악한 인상으로 몰아부친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아야 갈 거 아냐?'라고 되물었더니 "새로 문서를 발급 받아야 한다"고 한다.
헉! 다시 서울서 문서가 오가야 한단말인가? 청원경찰은 이제 문닫을 시간이니 얼른 돌아가란다. 갑자기 시계를 보니 4시 반. 문득, 문닫을 시간이라 쫓아낼 핑계를 찾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일 다른 지역에서 등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자동차관련 업무를 보는 곳이 두 군데 있는 데,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한 곳은 이곳보다 좀 먼 곳이다.
동양인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오전 운전면허를 취득했던 곳으로 찾아갔다. 기본 서류를 확인하자마자 말할 필요도 없이 자동차 등록절차를 마쳤다. 실제로 마감시간 다 되어서 들어 온 ‘동양인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 아니었을까.
이런 미국의 서비스 행태를 좋다는 얘기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엄격한 룰을 지키면 그 혜택이 크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키려하고, 그게 익숙해지면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언어나 문자에 익숙치 않은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은 완전히 배제해 놓은 논리이다. 더구나 그것이 관료적 행태와 결합했을 때 폭력적 서비스 제공으로 인해 좌절감을 맛보아야 한다.
결국 폭력적 서비스에 적응하는 것이지 그걸 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만함과 거만함으로 가득차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네가 잘못했으니까 다시 해 와!'라고 소리 지르는 서비스가 어찌 좋은 서비스인지 난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변호사나 자동차 중개상에게 부탁하면 오늘 이야기한 불편은 전혀 겪지 않아도 된다. 주변에도 처음부터 본인이 직접 하지 않고 중개상을 거친 경우엔 이런 경험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자동차와 관련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라는 기관은 정부관련 기구가 아니라 1999년에 설립된 민간회사이다. 일정한 지역내에서 이들은 독점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결국 관료적이고 독점으로 인한 폭력적인 서비스 제공은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는 셈이다. 뭐가 좋다는거야,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