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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한 장면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한 장면 ⓒ 축제를만드는사람들
늙고 예쁜 로맨스에 울다가 웃다가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위성신 작ㆍ연출)>는 '날라리 할아버지' 박동만과 '욕쟁이 할머니' 이점순의 사랑 이야기다. 외로운 두 노인의 만남과 사랑과 사별의 과정을 사계절의 흐름에 따라 웃음과 눈물의 이중주로 풀어낸다.

'황혼의 로맨스'라는 익숙치 않은 주제를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내 2003년 첫 공연 때부터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같은 해 한국연극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연극 베스트 7'에 뽑혔다. 그리고 이후 해마다 겨울철이면 배우를 바꿔 관객을 다시 찾아왔다. 지난해의 이순재ㆍ성병숙 커플에 이어 올해에는 양택조ㆍ사미자 커플이 새롭게 합류했다.

양택조ㆍ사미자 두 배우의 연기 인생은 40년이 넘는다. 라디오ㆍTV드라마, 영화, 연극, 창극 등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만도 합치면 수백편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소극장무대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기에 공연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흥분됐다"고 했다.

양택조 "대작 연극은 많이 해봤지만 소극장은 처음이거든요. 코 앞에 관객을 두고 하는데…. 나름대로 재미가 있더구만요."
사미자 "반응을 직접 느낄 수 있어요. 가까이서 호흡하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를 바로 느낄 수 있으니까 더 힘을 내게 되죠."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두 배우가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에 객석은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탄식으로, 그러다가 마침내 눈물로 화답했다. 그들은 또 그같은 객석의 반응이 극장밖 현실로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양택조 "어느 TV프로그램을 보니까 한 의사가 은퇴한 뒤 늙은이들에게 전립선 수술을 서비스로 해주고 다니더라고. 그런데 그 때까지 늙은이들은 전립선 때문에 성관계가 안된다는 걸 모른거야. 우리 연극을 계기로, 모든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같은 노인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사미자 "실제로 어제 가정에 무심한 한 남편이 부인에게 떠밀려 연극을 보러 왔었어요. 부인은 새벽에 일나가고 남편은 놀거든요.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남편이 아침에 밥을 지어놨더래요. 부인이 감격해서 전화했어요. 부부가 같이 보러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꼭 노인네만 봐야 된다는 건 아니예요. 젊은이들도 부모님의 삶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거든요."

"부부가 함께 오세요, 노인네만 보지 말고 젊은이들도"

ⓒ 축제를만드는사람들
두 배우 모두 지난해 사랑하는 가족들 곁을 떠날 뻔 했다. 양택조씨는 간경화로 생명을 위협받던 중 지난해 4월 외아들의 간을 이식받고 기적적으로 회복됐다. 사미자씨는 지난해 12월 지방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바로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지금은 모두 건강하지만 주변의 염려가 없을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2인극이다.

양택조 "건강한 사람이라도 1시간 반 짜리 연극을 둘이서 하다보면 피곤할 수밖에 없죠. 잠시 쉴 틈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루 연극이 끝나고 나면 지쳐 떨어진다고.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 관객에게서 반응이 오고 하면 힘이 나는 거지. 연극의 3요소를 배우, 무대, 그리고 관객이라는 이유를 알겠더라고."

사미자 "저는 연극이 없는 날 맥이 빠져요. 두 탕을 딱 뛰고 집에 들어가면 내가 뭔가 이루고 왔다는 느낌 때문에 에너지가 솟아나요. 그런데 쉬는 날에는 내가 지금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특히 다음 계획이 없을 때는 막연함 때문에 오히려 지치게 되는 거죠."

사미자씨는 이어 옆 자리의 '남편' 양택조를 돌아보며 "이 분이 '피곤해, 졸려' 그러실 때마다 '뭐가 피곤해' 그러며 활기를 불어넣어드린다"고 한 뒤 "그거 못 느끼셨어요,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활기찬가?"라고 물었다.

양택조 "그럼, 느꼈지."
사미자 "느꼈어요?"
양택조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나 하고."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는 연극 속의 동만과 점순 같았다. 실제로도 다소 지쳐보이는 양택조씨에 비해 사미자씨는 인터뷰 내내 활기찼다. "마음은 50대 초반"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예순을 넘긴 노배우라는 사실을 잊게 했다.

양택조 "방송은 작가들이 어려 우리 인생을 못 다루죠"

사미자씨의 나이는 66세. 양택조씨는 67세다. 모두 연극 속의 배역보다 실제 나이가 더 많다. 따라서 특별히 노역 분장이 필요치 않다. 그만큼 연기도 자연스럽다.

양택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축적된 인생의 경험 같은 걸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 작품을 하게 됐죠. 만약에 젊은 사람을 캐스팅해서 이 연극을 했다고 합시다. 과연 이런 맛이 났을까. 아무리 명연기를 해도 그건 안될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미자 "우리 나이에 표현할 수 있는, 괜히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더 좋은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하면 노역을 의식해 과장된 연기가 나오거든요. 그러면 요즘 관객들이 현명해 다 알아버려요."

연출가 위성신씨는 그같은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해 "안 하는 듯한 연기"라면서 "세밀하진 않더라도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맛은 나이드신 분들이 더 낫다"고 평가했다.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한 장면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한 장면 ⓒ 축제를만드는사람들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긍심을 조용히 내비치던 두 배우는 이야기 주제가 최근 드라마의 경향에 이르자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양택조 "방송은 너무 10대·20대만 얘기만 다뤄. 작가들이 어려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인생을 다루지 못하죠."

사미자 "맞아요. 드라마에서 우리 역할을 많이 밀어내더라고."

'그래도 두 분은 드라마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냐'고 했더니 정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양택조 "솔직히 얘기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드라마 분위기가 맞아야 하는데, 할 수 없으니까 억지로 나이많은 사람 하나 데려다 논단 말이야. 그리고 전부 애들만 있으니까…."

사미자 "그런데도 TV를 안 하면 시청자들에게서 존재가 잊혀져요. 어쩔 수 없이 들어오면 해야 돼요. 마음은 하고 싶지 않아도 들어오면 해야 돼요. 난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한번 불만이 터지자 그들의 비판은 거침이 없어졌다. 목소리도 더욱 격앙됐다. 다소 과장됐을지는 모르지만, 예상치 않게 노배우의 하소연을 듣게 돼 당황스러웠다.

양택조 "방송제작은 인사제도가 문제예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선 PD가 진급해 데스크로 가면 현장을 안 한단 말이에요. 그럼 젊은 애들이 현장에서 내려와 연습하고 앉았다고. 요즘은 한 장면 찍으려면 여덟번은 찍어야 돼. 방송이란 게 시간싸움인데 이런 쓸데없는 씨름을 하고 있으니…."

사미자 "PD들의 연령이 너무 낮아졌어요. 웬만큼 하는 PD들은 다 CP(부장·국장급 PD)로 가버렸어. CP로 가면 권력이 좋을 것 같죠? PD들이 말을 안들어요. CP는 그저 뒷전 데스크야. 그런데 우리 알던 사람들이 다 CP나 국장으로 가버리니까 우리 존재를 점점 더 몰라준다구요. 에휴 싸게라도…."

얘기가 더 치닫기 전 다행히(?) 한 스태프가 와 식사 준비가 됐다고 알렸다. 분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사미자 "김태희랑 젊은 시절 비교하는데 참 민망스럽죠"

분장실 탁자에는 가까운 식당에서 배달해온 청국장·김치찌개·제육볶음 등이 차려져 있었다. 조촐했다. 게다가 스태프까지 모두 함께 들기엔 양도 적었다. 불청객으로 끼어들게 돼 미안했다. 사미자씨는 종이컵에 밥을 떠주며 "양이 적어 어떡하냐"며 신경을 썼다. 양택조씨는 "예전엔 굶으면서도 연극했는데, 난 이런 데 익숙해"라고 말했다.

식사를 끝낸 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배우의 눈에는 젊은 신인 배우들의 연기가 어떻게 비칠까. 식사 전 기운이 남아있던 까닭인지 평가는 신랄했다.

양택조 "TV는 그냥 카메라 갖다 들이대고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연기가 아니죠. 한 번은 방송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배우와 함께 연극을 했는데 무대에서 발걸음을 못 떼어놓는 거야. 이 친구가 코가 석자나 빠져가지고…, 허허…, 그러니까 연기하는 사람들은 무대를 꼭 거쳐야 돼요."

사미자 "많은 사람들이 요즘 신인들을 보면서 뉴스페이스가 어쩌면 연기를 저렇게 잘하나 그래요. 그런데 내가 아나운서는 아니지만, 요즘 애들은 우리말 고저장단을 몰라요. 굉장히 화가 나요, 어디다가 액센트를 주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데 그걸 제멋대로 해버리니까. 그래서 지적하죠, 그럼 PD들이 싫어해요."

양택조씨가 말을 받았다. "뭘 틀렸는지 PD도 모르니까. '바쁜데 그냥 넘어가지, 늙은이가 잔소리 많네' 이렇게 생각하겠지."

ⓒ 축제를만드는사람들
분위기 반전을 위해 사미자씨에게 젊은 시절 '얼짱' 사진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녔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사미자 "김태희 사진이랑 비교하고 하던데 참 민망스럽죠. 다 늙은 얼굴에 지금 시대에 제일 예쁘다는 사람하고 자꾸 비교하니까. 늙으면 저렇게 하잘 것 없구나 하는 걸 보여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러나 네티즌들이 그걸 기억해주고 격려해주고 하는 데 대해선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해요."

사미자씨는 최근 한류 드라마 열풍으로 해외에서도 인기를 실감한 경험도 들려줬다.

"최근에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 이런 작품들이 해외로 다 팔렸어요. 중국이나 대만이나 일본에 가면 다 알아봐요. 내가 요즘 인기있는 젊은 한류스타는 아니지만 원조 한류 할머니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봐요(웃음)."

두 사람은 그동안 연기활동뿐만 아니라 '정치적 노선'도 같이해왔다. 지난 대선 때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연예인홍보단으로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혹시 정계 진출에 뜻이 있는 걸까.

사미자 "대부분 (연예인들은 정치판으로) 갔다가 다시 오잖아요. 나는 죽어도 할 맘 없어요, 죽어도. 뭐하러 가서 그런 걸 해요."

양택조 "난 만약 정치를 한다면 1년도 못가서 죽을 거야. 왜냐면? 열받아 가지고.(웃음)"

사미자씨가 거기에 덧붙였다. "그리고 이상한 게 왜 정치인이 되면 다들 나와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그렇게 바보스럽죠? 우리는 대사를 외우든 인터뷰를 하든 명확하게 이야기하는데, 거기 가면 다 바보 같아."

그 날까지 연기는 계속된다

'늙은 배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저녁 공연을 위해 인터뷰를 끝마쳐야 했다. 마지막으로 '언제까지 연기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사미자 "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줄 때까지 할 거예요. 상대방 연기자한테 스태프한테 피해를 안 줄 때까지. 생생하게 대사를 잘하고, 생생하게 연기할 수 있는 그 날까지. 대사 몇 마디 줬는데 그걸 못해 자꾸 NG 내고 그러면 피해를 주는 거잖아요. 나는 아직까지는 대사를 외울 머리를 갖고 있으니, 아직까지는 희망을 갖고 일을 해요."

양택조 "마찬가지에요. 그건 자기가 알아요. 촬영이 있거나 연극이 있는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도저히 몸이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관둬야 돼요. 그걸 억지로 나갔다가 현장에서 쓰러지거나 사고라도 일으키면 그게 뭐예요, 피해를 주는 거지. 자기가 알아요. 관둬야 될 그 날을 자기가 안다고."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는 내년 1월 14일까지 공연한다. 노배우의 '그 날'에 앞서 좀더 가까이서 그들의 연기를 호흡하고 싶다면 부모님과 함께 모처럼 극장 나들이를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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