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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잠시 눈을 감고 있다.
ⓒ 연합뉴스 박창기

급박하게 돌아간 하루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두 번의 퇴짜를 맞았다.

한나라당으로부터 여·야·정 정치협상회의를 거부당했고,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청와대 만찬을 거부당했다. 딱지를 놓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지명을 철회했다. 어제(27일) 하루 동안 세 번의 뒤틀림 현상이 연출된 것이다.

얼핏 봐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협상회의를 거부당한 노무현 대통령이 전효숙 헌재소장 지명을 철회한 것이나, 정치협상회의를 환영한다던 열린우리당이 당·청 회동을 거부한 것이나 지켜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그러던 차에 오늘 눈 여겨 봐야 할 보도가 나왔다. <중앙일보>가 내놓은 보도다. 이런 내용이다.

지난 25일 열린 당·정·청 4인 회동에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이 대통령 면담을 여러 차례 신청했지만 이유도 듣지 못한 채 번번이 거부당했다며 12월 9일까지 당·정·청이 한 몸으로 갈지, 중립내각으로 갈지 결론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이병완 비서실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즉각 참모회의를 소집해 여·야·정 정치협상을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비로소 윤곽이 드러나고 흐름이 잡힌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청 관계는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최후통첩, 청와대의 노림수

김근태 의장이 시한으로 내건 12월 9일은 정기국회가 끝나는 날이다. 여야 원내대표 합의에 따라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게 돼 있다.

김근태 의장이 밝혔고,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정한 날이 바로 이 날이다. 이 날까지 정계개편 논의를 중단하기로 했다. 거꾸로 말하면 이 날을 기점으로 정계개편 논의 물꼬가 터지게 돼 있다.

김근태 의장이 당·정·청 4인회동에서 밝힌 내용을 최후통첩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날까지 청와대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근태 의장의 최후통첩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대답은 정치협상회의였다. 무슨 뜻인가? '하거나 말거나'다. 열린우리당이 정계개편을 하든 말든 한나라당의 협조를 구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판단에는 두 가지 생각이 겹쳐있다. 열린우리당만으로는 국정 마무리 입법을 추진하기가 어렵다는 불신감과 정계개편보다 더 급한 건 국정마무리라는 절박한 심정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정치협상회의를 거부했다. 당이나 청와대 모두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한 셈이다.

잘 될까?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청와대 초청 만찬을 거부했다. 열린우리당도 '하거나 말거나' 모드로 돌아섰다. 청와대가 협조를 구하거나 말거나 제 길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청와대도 밀릴 기세가 아니다. 오늘 국무회의를 열어 자이툰부대 파병연장 동의안을 의결할 예정인데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요구한 철군계획서 첨부를 거부할 계획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지명을 철회하면서 한나라당에 재고해 달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중인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28일 오전 열린정책연구원이 주최한 전문가 초청 정책간담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과 과제`에 참석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당·청의 '하거나 말거나' 모드, 그 끝은?

거듭 확인된다. 당과 청와대 모두 '하거나 말거나' 모드로 돌아섰다. 이런 상황이라면 서로 등을 돌리고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으로 이어지는 건 시간문제 같다. 현상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매사가 그렇게 단순명료한 건 아니다. '하거나 말거나' 모드를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해볼테면 해봐'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열린우리당 사정이다. 12월 9일을 기점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갈라서기에 나선다고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인다는 보장이 없다. 당내 친노 그룹의 극심한 반발을 뚫어야 하고, 대선 후보 부재 상황이 퍼뜨리는 불안감도 해소해야 한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지금 당장 그럴 힘이 없다.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속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월 노사모 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퇴임 후에도 정치와 언론운동을 계속 하겠노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작심했다면 중립내각을 꾸려 스스로 정치 입지를 극도로 좁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카드, 즉 극단적 공세 카드를 꺼내 상대의 굴복을 강요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임기동안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이런저런 타협과 굴복이 필요하다면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임기를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무슨 뜻인가? 여차하면 대통령직을 사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로 이런 포즈를 취하면 급해지는 곳은 열린우리당이다. 가뜩이나 힘이 없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나오면 '대략난감'이 아니라 '초난감'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현재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은 당적과 대통령직 두 가지 뿐이다. 만일 당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면 임기 중에 당적을 포기하는 네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고 이는 아주 불행한 일이다. 가급적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지만 그길 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 김근태 의장의 입장이 곤혹스럽게 됐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다. 최후통첩을 날렸더니 더 센 최후통첩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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