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씨네 21
얼핏 보면 순정만화의 제목같기도 하다. 이 책 <안녕, 뉴욕>은 씨네21기자였던 백은하 기자가 뉴욕에서 영화와 함께 보낸 408일의 기록을 적은 책이다. 낮에는 네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극장을 찾아 뉴욕 맨해튼 거리를 샅샅이 헤매고 다닌 순례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맞다. 영화에 대한 '순정'을 담은 책이다

뉴욕은 길 모퉁이 카페, 허름한 상점,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기차역,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평범한 건물 하나하나가 모두 영화의 무대 그 자체를 이룬다. 별 대단치도 않아보이는 신호등, 다리, 꽃집, 식당 이런 것들이 모두 명작과 함께 그 숨결을 같이 했다니 뉴욕이야말로 영화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그 향기를 맡고자하는 영화광들에게는 천국이다. 순례지이다.

"맨해튼 곳곳에 숨어있는 영화 속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나 홀로 영화순례', 멀티플렉스에 도시락까지 싸들고 가서 하루 종일 죽치고 놀던 '범죄성 영화 소풍', 아르바이트를 마친 저녁에 마지막 회 영화를 보고 미로같은 웨스트 빌리지를 걸으며 그날 본 영화를 맛있게 되새김질 하던 내일 또 무슨 영화를 볼까 배낭여행자처럼 계획하던 그 밤들을 과연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책을 내며' 중)

백은하 기자와 함께 하는 영화순례는 흥미진진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국내에서 개봉한 유명작품은 물론이고 쥐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후미진 극장 한 구석이나 유령이 나올 듯한 언더그라운드 영화제,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죄다 모인 듯한 B급 영화, 독립영화제, 크고 작은 지역단위별 영화제에서 보고 느낀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지은이가 붓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나온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영화를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영화광들에게 축복이다. 인도 매음굴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실태를 보여준 다큐멘터리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현실을 고발한 스파이크 리 감독의 <서커 프리 시티>, 뉴욕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제3세계 노동자의 초상을 그린 <기품 있는 마리아> 등이 그렇다.

이외에도 더있다. 남녀 풍속도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담은 이탈리아 감독 푸비 아바티의 작품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들>, 우리에게는 <디 아더스>로 유명한 알레한드로 아베나브르 감독의 작품으로 '안락사'라는 민감한 문제를 깊이 있으면서 아름답게 표현한 <바다 속으로>, 소년시절의 성폭행이라는 사건을 두고 추리형식의 기법으로 접근한 <미스테리어스 스킨> 등과 같은 작품은 영화광들의 뜨거운 열정에 더욱 불을 붙인다.

뉴욕은 하나의 거대한 영화세트장

이 책을 읽은 영화광들로 하여금 너도나도 뉴욕행을 꿈꾸게 만드는 데는 무엇보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한 몫 한다. 가히 영화의 도시라 불리는 뉴욕이라는 곳은 크고 작은 수많은 영화제가 개막과 폐막을 번갈아 하며, 유명감독들과의 대화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이루어진다. 정신 바짝 차리고 영화 스케줄을 챙기지 않는 한 좋은 영화들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듯 놓치는 일이 다반사다.

영화로 넘쳐나는 뉴욕 풍경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매력중의 하나다. 영화감독 짐자무시와의 대화, 영화 평론가 로저 애버트의 출판기념회 풍경, 긴밀한 파트너십을 자랑하는 에단 호크와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보여준 우정과 열정 그리고 오스카 감독상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했던 마틴 스코시지 감독에 대한 연민과 지지 등 지은이의 솔직한 감상이 적혀있다. 여기에는 영화 기자의 날카롭고 예리한 시각으로서가 아닌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서의 따뜻함과 열정이 배어있다.

숨바꼭질을 하듯 뉴욕의 도시 속에 숨어있는 영화 속 배경 곳곳을 소개해놓은 코너 '당일치기 영화여행'도 흥미롭다.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 지은이의 발품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첨밀밀>에서 두 연인이 만나는 소호거리, <인 굿 컴퍼니>에서 나왔던 카페, <언페이스풀>에서 남녀주인공이 위험한 정사를 벌이던 카페 누아르, <프렌즈>에서 여섯친구들이 살던 아지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맥라이언이 오르가즘을 연기하던 레스토랑 등 실제 영화 속 장소가 소개되어있다. 물론 대중교통편도 자세히 안내해놓았다.

지은이는 자신을 '뉴욕 데이 트리퍼(day tripper)'라고 표현했다. '뉴요커'가 아닌. 아마도 뉴욕이라는 영화의 숲을 날마다 새로운 기분으로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안녕 뉴욕/ 백은하 글, 사진/ 씨네 21/ 16,500


안녕 뉴욕 - 영화와 함께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글.사진, 씨네21북스(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