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사람들은 길 위를 걷는다. 길을 인생에 빗대듯 사람과 길은 항상 맞닿아 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처럼 길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고 있다.
여기 길 위를 걸어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순례자의 그것과 같이 고행이었다. 애틋한 부정(父情)을 안고 150여Km를 두 발로 걸어온 그의 사연은 이렇다.
아들을 잃고 150Km를 걸어온 아버지
경북 영주에 살고 있는 박재근(42)씨는 학교폭력으로 아들을 잃었다. 지난 27일 새벽 일찌감치 간단한 짐을 챙긴 박씨는 영주의 P중학교 앞에서 기나긴 도보순례의 첫 발을 뗐다.
영주에서 시작한 박씨의 도보순례는 안동과 의성을 거쳐 군위와 칠곡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9일 대구 근교에 도착한 그는 30일 오전 최종 목적지인 경북도교육청(대구시 북구 산격동 소재)에서 도보순례의 끝을 맺었다.
장장 150Km에 달하는 박씨의 대장정은 지난해 어처구니 없이 숨졌던 아들 준석(사망 당시 14세)이 때문에 시작됐다. 걷는 것으로 박씨는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억울함을 세상에 내뱉으려 했다.
중학생이던 준석이는 지난해 5월 9일 오전 11시 25분쯤 수업시간 중 사망했다. 그것도 교실 안에서 빚어진 참극이었다.
수업이 한창이던 그 시각 준석이는 뒷 자리에 앉아있던 같은 반 친구에게 목 뒷부분을 수차례 맞았다. 경찰 등에 따르면 수업 도중 당시 준석이가 뒷자리 친구와 말다툼을 벌였고 이 와중에 빚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결국 교사들에 의해 준석이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뇌지주막 출혈로 인한 사망이었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또하나의 죽음에 준석이가 희생된 것이다.
황당한 죽음이었다.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수 개월간 아버지 박씨는 술로 지내면서 황당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견뎌야했다.
아들의 죽음보다 더 황당한 현실..."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어"
하지만 지난 7월쯤 박씨는 더욱 힘든 현실에 부닥쳤다. 아들의 죽음만 슬퍼하던 박씨는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조사 결과를 보고 황당해했다.
가해 학생은 형사처벌 제외 대상인 촉법소년(형벌 법령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12세 이상 14세 미만의 소년)에 해당돼 보호자의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박씨는 처분 자체에 대한 억울함은 차치하더라도 경찰 조사에서마저 진실이 왜곡돼 있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장례 치르고 슬프하기만 했죠. 근데 경찰 조서를 뒤늦게 봤더니 준석이가 장난을 쳤다고, 마치 모든 일이 우리 아이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돼 있잖아요.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러나 무엇보다 학교와 교육청이 취한 행태는 그를 더욱 힘들게, 아니 분노하게 했다.
"처음에야 그저 잘 마무리될 줄 알았죠.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학교 쪽 사람들도 장례식장에서 인사치레로 '미안하다'는 말만 하지 공식적으로 사과도 없었죠."
그는 지금 준석이의 죽음과 관련해 학교와 교육청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담당 교사가 수업 분위기만 제대로 잡았어도 이런 불상사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박씨에게 남은 미련이다.
"교육청, 아이들 장난으로만 치부하기 급급"
그동안 박씨는 해당 지역교육청 앞에서도 1인 시위를 벌이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항의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고 한다.
"내 아이가 죽은 것도 억울한데, 학교나 교육청은 단순히 아이들 장난에서 빚어진 사고로만 치부하더군요. 그래야 자신들은 책임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에 대해 경북도교육청 한 장학관은 "수업 중 담당 교사는 학생의 질문을 받고 있었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면서 "형사재판 과정에서도 학교 측의 잘못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 장학관은 또 "나름대로 이 사건의 해결과 학교폭력 방지를 위해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말하고 "하지만 피해학생의 아버지가 도교육청의 핑계만 대고 있다. 민사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단정 짓지 못하지만 돈 때문에 반발하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박씨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재발방지를 위한 교육청의 적극적인 자세가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준석이는 죽었지만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의해 희생되고 있어요. 교육청이 준석이의 죽음처럼 사과도 없고 숨기기에만 급급하니깐 대책도 없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지어버리면 안됩니다."
준석이의 죽음과 이미 수개월의 지리한 싸움은 박씨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힘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박씨는 멈출 수 없는 싸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준석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떳떳이 밝히고 억울하지 않게 해주는 거예요. 더이상의 학교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청이 책임있는 자세로 나올 때까지 계속 싸울 겁니다."
박씨의 도보순례는 끝이 나지 않은 셈이다. 박씨는 교육청이 이후에도 계속 사건과 관련해 책임있는 자세와 학교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청와대까지라도 걸어갈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아들의 사진을 훔쳐보면서 수백Km를 길을 걸었다는 박씨. 그에게 고행의 길은 언제쯤 막다른 곳에 다다를까?
| | | 심각한 학교폭력...하지만 "희생자는 없다"? | | | | "학교폭력은 있지만 희생자는 없다?"
과연 아이러니한 이 명제는 옳을까. 지금까지 학교폭력을 대하는 학교와 교육청의 태도만을 놓고 보자면 납득도 가능하다.
최근 학교폭력이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건찬 학교폭력예방중앙센터 사무총장은 "학교폭력이 점차 집단화·흉폭화·저연령화 돼 가고 있다"면서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학교폭력을 대하는 학생들의 죄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학교폭력예방센터는 수치상으로도 학교폭력이 매년 10%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상 매년 5% 이상 줄여나가겠다는 교육부를 비웃는 모양새다.
무엇보다 문제점은 희생자를 무시하고 사건 무마에만 서두르는 학교와 교육청의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 사무총장은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학교와 교육청은 은폐하거나 축소·왜곡하는데 급급하다"면서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와 가족을 납득시켜 피해보상을 하고, 가해자와 해당 관계자들에게 상응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숨기려고 하니 오히려 학교폭력의 가해자 편을 드는 꼴이 된다"면서 "결국 이를 지켜보는 가해자나 학생들도 학교폭력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관련 시민단체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민간단체인 학교폭력예방중앙센터는 최근 학교폭력 알리미 차량을 제작했고 내년 상반기 중 학교폭력 이동 상담실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 학교폭력 희생자들의 가족들로 이뤄진 학교폭력피해자가족연대(대표 이재현)도 지난 7월 발족해 ▲학교폭력 사건 진상규명 ▲근본적인 대책 마련 촉구 ▲촉법소년 연령 인하 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 이승욱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