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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에 잠긴 주문진항
어스름에 잠긴 주문진항 ⓒ 김대갑
김주영의 소설 <아라리 난장>은 바로 이 주문진을 주요 무대로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창범은 서울에서 잘 나가는 직장에 다니다가 실직을 하게 되고, 그 여파로 이혼의 아픔을 겪게 된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그는 무작정 동해로 가는 여정에 오르는데, 가던 도중에 추루하면서도 거침없는 장사치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그와 동행하게 된 창범은 그 장돌뱅이의 주요 근거지인 주문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승희와 태호, 변씨 등 다양한 인물군을 만나면서 현대판 장돌뱅이로 변신하게 되고 실의를 극복하게 된다.

IMF시대에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 소설에는 전국 각지의 장터를 현장 취재한 작가의 치열한 모습이 눅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아라리 난장>은 삶의 희망을 잃고 방황하던 수많은 가장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던 소설이었다.

아들바위 공원 전경
아들바위 공원 전경 ⓒ 김대갑
그런데 이 주문진항의 끝에 가면 ‘소돌항’이라는 작고 아담한 항구가 하나 있다. 주문진항이 어머니의 항구라면, 소돌항은 아들 항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귀여우면서도 한적한 항구이다.

이 항구는 마을의 전체적인 형상이 소의 모습이라서 ‘소돌(牛岩)’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곳에는 민초들의 남아선호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작은 공원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이름하여 '아들바위공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우선 아들바위공원에는 동해안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기괴한 바위 덩어리들을 볼 수 있다. 소바위, 코끼리 바위, 아들바위로 불리는 그들은 천만겁의 무수한 세월동안 파도와 풍상에 깎이고 깎인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움푹 들어간 몰골이 마치 해골 같은 괴기스러움을 안겨주기도 하고, 송송 뚫린 바위 구멍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의 긴 궤적이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귓가를 스치기도 한다.

또 아들바위 공원은 바다에 떠 있는 작은 공원이라고 할 정도로 아늑한 느낌을 안겨주는 곳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바다에 잠겨 있던 바위들을 화강석으로 곱다시 연결한 매무새가 무척 정겹고, 고추를 내놓고 ‘나 좀 봐라’하며 시위하는 갓난 아들 형상물이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아들바위 공원은 기묘하면서도 정겨운 분위기가 동시에 풍기는 묘한 곳이기도 하다.

아들바위
아들바위 ⓒ 김대갑
아들바위 공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민족가수 배호의 노래비이다. 1971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배호는 한의 정서가 담긴 노래를 가장 좋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불렀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였다.

아들바위 공원에는 배호의 노래인 파도를 원형석에 새긴 노래비가 동해의 짙푸른 빛을 가득 받은 채 서 있다. 그 배호를 못 잊어 매년 이곳에서는 배호 모창대회가 열린다고 하니 수 십 년 전에 요절한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들바위'일까? 그렇게도 아들이 갖고 싶은 심리적 기저는 무엇일까? 1억5천만년 전인 쥐라기 시대에 바닷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저 바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수많은 새댁들이 기를 쓰고 기도를 올렸던 것일까? 그놈의 아들이 무엇이 길래.

아들바위 원경
아들바위 원경 ⓒ 김대갑
'여성의 전 세계사적인 패배!' 이 말은 인류가 채집생활에서 수렵생활과 농경생활로 넘어가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모든 의사결정 권한이 여성에게 있었다. 그 이유는 여성이 모든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인류의 결혼 형태는 군혼과 난혼이었으며, 자식들의 어머니는 동일 하였지만 아버지는 상이한 상태였다. 남성은 단지 종족 번식을 위한 종마(?)의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수렵생활로 접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동물을 추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구조상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었다. 결국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짐승을 잡을 수 있었고, 그 짐승을 여성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성의 분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국 남성은 여성을 추월하여 경제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여성은 남성의 생활력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바위'는 이런 남성 중심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아들, 가문의 성씨를 지켜야 하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하나의 '사상'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이런 사상이 바위, 나무, 바다, 해와 같은 자연물에 투영된 것이다.

소바위
소바위 ⓒ 김대갑
이 아들바위에는 작은 전설 하나가 전해져 온다. 수세기 전이었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부부가 이 바위의 구멍에 머리를 내밀고서 백일동안 정성들여 기도를 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후에 이 바위는 아들을 낳고자 하는 부인네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남아선호사상, 기자(祈子)신앙, 남근숭배사상은 그 발현되는 모양새는 서로 다르지만 뿌리는 동일한 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동해안에는 이런 문화적 현상이 전 마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는 성황당으로, 일부는 자연물에 대한 경외심으로, 또 일부는 무속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돌항의 아들바위 또한 이런 문화적 현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아들바위라고 지칭되는 바위는 정작 아들보다는 딸의 형상을 더 닮은 바위라고 할 수 있다. 풍성한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을 닮았기도 하고, 궁둥이가 펑퍼짐한 살림꾼 아낙의 모습을 닮았기도 하다. 이런 바위를 '딸 바위'라고 부르지 않고 '아들바위'라고 부른 백성들의 소박한 토속신앙이 그저 가엽게 느껴질 뿐이다.

어린 아들의 모습
어린 아들의 모습 ⓒ 김대갑
예전에 어느 현감이 미색이 고운 진이라는 처녀에게 수청을 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진이는 현감의 청을 거부하였고, 현감은 일종의 괘씸죄를 진이에게 덮어씌워 좁고 어두운 방에 가두고 말았다.

얼마큼 긴 세월이 흘렀을까? 사람들이 방문을 열어보니 진이는 죽어 있고 그 곁에는 핏덩어리의 여린 몸이 있었다. 아이는 어미의 한을 품은 듯 푸른 살색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지. 그 후, 진이의 한 때문인지 주문진에는 풍랑과 파도가 항시 몰려와 어민들이 조업을 하지 못했다.

어느 해인가, 새로 부임한 강릉부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진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바닷가 근처에 작은 사당 하나를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 후로 풍랑과 파도가 모두 사라져 어민들이 안심하고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사당은 진이서낭이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주문진항을 고즈넉하게 바라보고 있다.

형형색색의 포장마차들이 도루묵과 조개를 굽는 냄새를 풍기며 손님을 유혹하고 있는 소돌항. 그 항구를 벗어나 다시 주문진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소돌항보다 더 크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자가사리 끓듯 시끄럽게 들려온다.

활기와 생명이 넘치는 항구. 건어물 가게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수평선의 냄새. 그리고 억척스럽게 들려오는 강원도 아줌마들의 싱싱한 고함소리. 자세히 보니 주문진 항의 모든 수산물 가게 주인은 거개가 아줌마였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가격을 요리조리 흔들어 대는 품이 정신을 다 얼얼하게 한다. 그 여인네들의 억센 생기가 물씬 풍겨나는 곳이 바로 주문진항인 것이다.

앞으로 주문진항에는 아들바위공원과 더불어 딸 바위공원도 세워질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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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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