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니 너른 품에 안기면
비릿한 갯내음 속에 아스라한 추억이 묻어난다
시커먼 갯벌에 발목까지 푸욱 빠진 낡은 고깃배
어민들의 억센 삶을 쪼며 끼루룩 끼루룩 나는 갈매기떼
코 끝을 고소하게 파고 드는 새우젓 내음
마악 석쇠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전어
망둥이 우럭 소라 꽃게처럼 생긴 아낙네들의 고함소리
서러운 세상 몽땅 불사르며 후여후여 지는 노을
니 대충 동여맨 옷고름을 풀면
슬며시 배가 고파진다
니 까아만 젖꼭지를 살짜기 깨물면
탱글탱글 솟아오르는 억센 삶의 비릿함에
짭쪼롬한 바다 내음과 농익은 젓갈내음에
젖을 빨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만선의 기쁨 오색 깃발로 펄럭이며
포구를 향해 통통통 달려오는 작은 고깃배들
여기저기 기운 그물에 담기는 어민들의 하루
시커먼 갯벌에 서서 썰물을 낚고 있는 낚시꾼
녹슨 철로로 뻗어나가는 아낙네의 잿빛 꿈
여섯 개 천 원 하는 국화빵으로 익어가는 세상살이
그 왁자지껄한 포구 비린내 풀풀 피어나는 어시장에 서면
거친 삶이 파닥댄다 소주가 생각난다"
- 이소리, '소래포구에 서서' 모두
소래포구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
나, 소래포구. 나 주민등록증 주소지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번지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나이는 칠십대 중반을 훌쩍 넘겼다. 사람으로 치면 황혼기다. 하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바쁘다. 이젠 쉴 나이도 되었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BRI@내 몸 위에 다리를 놓고, 시멘트 둑을 쌓고, 온갖 쓰레기와 하수를 내려보내 나를 무척이나 괴롭히면서도 사람들은 나를 붙들고 온갖 소리를 다 내뱉는다. 추억이 깃든 포구라느니,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느니,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좋다느니, 싱싱한 생선회의 맛이 기막히다느니, 김장철 값싸고 질 좋은 젓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느니, 하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이제 쉬고 싶다. 그동안 사람들은 내 몸 곳곳을 이리저리 도려내 흙을 채운 뒤 도로를 닦고 상가와 아파트를 지었다. 그 때문에 나의 몸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내 몸 속에서 살던 물고기들과 조개들도 개발과 공해에 떠밀려 수없이 죽거나 수없이 떠나갔다. 지금 내 몸은 예전의 나가 아니다.
요즈음에도 사람들은 추억의 협궤열차가 다니는 곳이라며 나를 찾아오곤 하지만 그 철길은 녹이 슬어버린 지 오래다. 내게 오면 우리나라 소금 중 가장 질이 좋다는 천일염이 난다는 얘기도, 싱싱한 생선들이 많다는 얘기도 이젠 옛말이다. 지금의 생선들은 내가 모두 키운 것들이 아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날이 갈수록 타지에서 가져오는 생선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1930년대 끝자락, 왜놈 손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까닭은 대략 이러하다. 1930년대 끝자락, 왜놈들이 화약의 원료가 되는 질 좋은 서해안의 천일염을 빼내기 위해 수인선 철도를 놓으면서 나의 삶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나룻배 한 척을 타고 수인선 철도를 건설하는 노동자들과 염전 노동자들이 이 곳에 들어오면서 나는 포구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뒤 1960년대 초, 실향민 6가구 17명의 어민들이 나를 찾아와 어촌계를 만들고, 돛단배 몇 척으로 고기를 잡아 식의주를 꾸려가면서 나는 본격적인 포구의 역활을 맡았다. 그때 어민들은 가까운 바다에 나가 돼지그물을 사용해 새우를 잡았다. 그리고 그 새우로 젓갈을 담아 이른 새벽 머리에 이고 인천, 부평, 서울 등지에 나가 팔았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나는 제법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즈음부터 어민들은 돛단배를 통통배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어선 수가 점점 늘어났고, 새우뿐만 아니라 다른 싱싱한 물고기들도 꽤 많이 잡았다. 그리고 수인선을 오가는 협궤열차를 이용해 다른 지역 상인들과 일반 소비자들의 발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내 몸 위에 선착장 및 공판장 등, 어시장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시설들을 만들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어 1980년대에는 TV 등 여러 언론에서 나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사실, 그 때문에 나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는 탔지만 내 몸은 사람들의 발길에 더욱 망가지게 되었다.
고소한 전어구이와 싱싱한 쭈꾸미회, 새우젓갈 맛 일품
나, 소래포구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젓갈이다. 사실, 맛있는 젓갈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금의 농도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자랑하는 새우젓갈도 바로 서해안의 질 좋은 천일염과 어민들의 오래된 경험이 서로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김장철만 다가오면 전국 곳곳의 아낙네들이 새우젓을 사기 위해 나에게 몰려든다.
지난 10월 22일(일) 오후에는 어떤 시인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시커먼 속내(갯벌)를 거의 다 드러낸 나를 보자마자 디카를 꺼내 사진을 마구 찍었다. 내 모습만 찍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인은 협궤철도를 건너더니 여섯 개 천 원하는 국화빵도 찍었고, 어선과 갈매기, 소래시장 곳곳에 있는 물고기들을 보이는 대로 마구 찍었다.
나는 당황했다. 저 시인이 나와 내 주변의 모습을 자꾸 찍는 것은 그동안 내가 숨기고 있었던 검은 속내를 언론에 알리려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날 그 시인이 꽃게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주인 아낙네가 "출연료 줘야 돼요"라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그러자 대답을 하는 그 시인의 말이 걸작이었다. "이 집에서 꽃게찜이라도 먹고 가라는 그 말씀이지요?".
웃기는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 시인이 그 아낙네 집에 들어가더니 꽃게찜은 시키지 않고 뜬금없이 해물칼국수를 시키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아낙네는 생긋 웃으며 그 고소한 전어구이와 쭈구미회까지 덤으로 주는 게 아닌가. 아무리 나를 끼고 살아가는 아낙네들이 '손이 크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단돈 2~3만 원으로 황해의 싱싱한 속살 모두 맛보다
근데, 더욱 웃기는 일은 그 시인이 전어구이와 쭈꾸미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쭈욱쭈욱 들이키더니, "소래포구, 하면 금방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그날 팔아치우는 게 생명인데, 이 쭈꾸미와 전어는 며칠 지난 것 같지만 맛은 쫄깃하고 고소하네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그 시인은 아직까지도 나를 예전의 나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인에게 "그래도 아직까지는 소래포구가 최고여. 황해의 속살맛 보려거든 내 품에 안기지 않고는 못 배길 걸"이라는 한 마디 하려다 참았다. 참고로, 요즈음 들어 하도 찾는 사람이 많아 일부 물고기를 타지에서 가져오긴 하지만 그래도 소래시장에는 아직까지 내 몸에서 자란 물고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러둔다.
사실, 우리나라 어느 포구나 어시장을 찾더라도 2만 원 남짓한 돈으로 그 쫄깃하고도 감칠맛 맴도는 싱싱한 우럭회를 어찌 사 먹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수많은 젓갈과 먹어도 먹어도 입이 자꾸만 당기는 신선하고도 푸짐한 조개구이(바지락, 키조개, 홍합, 가리비, 동죽, 고둥, 피조개)를 어디서 한꺼번에 맛 볼 수 있겠는가.
그래. 내 몸에서 오죽 여러가지 해산물이 많이 났으면 사람들이 날더러 "진흙탕 갯벌속에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사는 달동네"라고 했겠는가.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협궤철도 아래 줄줄이 늘어선 조개구이집에 들어가 여러 가지 조개를 구워 먹으며 "조개껍질과 함께 사랑도 타들어간다"고 했겠는가.
나, 소래포구. 지금의 나는 예전의 건강함에 비해 몸이 많이 상했다. 소정방이 다녀갔다 해서 지었다는 내 이름 '소래'의 뿌리조차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김장철이 다가온 요즈음 한번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 사람들의 지친 세상살이를 싱싱한 해산물과 구수한 젓갈로 포근하게 감싸주리라.
한 가지 더. 황해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통통배가 들어오는 시간(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에 맞추어 나를 찾아오면 더욱 푸짐한 인정을 느낄 수 있다. 황해에서 갓 건져올린 싱싱한 물고기를 선주와 흥정하여 값 싸게 많이 살 수 있으니까. 덤으로 해를 등지고 갈매기떼를 몰며 들어오는 고깃배의 아름다운 풍경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