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신문기사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뉴욕의 소호거리에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북카페가 있다는 기사였다. 이후 그 북카페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내가 미국을 방문한 김에 소호 거리 구경도 할 겸 북카페를 찾아보기로 했다.
소호 거리는 잘 알려진대로 미술의 거리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명동이나 이대입구처럼 쇼핑의 거리이기도 하다. 상점의 불빛과 줄지어 선 노점상들을 뒤로 하고 한 골목 뒤로 가면 언제 소호거리였던가 싶다. SOHO에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South Of Houston'의 줄임말이란다. 즉, 하우스톤 거리를 중심으로 남쪽이 소호, 북쪽이 노호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이미 거리는 어두워져 있었다. 서점이 위치한 곳은 번화한 소호거리의 뒤편 골목이라 어둡고, 특별히 네온사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다행히 주소를 인터넷에서 확인해 두었기에 그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건물에 'Housing Works Used Book Cafe'라고 쓰여있긴 하지만 어두워서 그리 잘 보이지 않는다.
책 9권에 40달러? 한 권 값이네
@BRI@문을 열고 들어서니 제법 큰 공간이 2층으로 꾸며져 있다. 입구에선 안내원은 큰 가방 같은 것을 보관해 준다면서 우리가 멘 가방을 달라고 한다. 헌책방 스트랜드(여기도 유명한 곳이다. 나중에 한 번 따로 소개하고 싶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만만치 않게 책이 많다.
거의 대부분이 중고책이다. 우리 가족은 각자 몇 권씩 책을 골라냈다. 나와 딸아이는 주로 소설책을 골라냈고, 아내는 자기 관심사가 그래서인지 영화 관련 책을 찾아냈다. 도합 9권을 샀는데, 40달러 조금 넘는 정도였으니까 하드카버 책 한권 값에 9권을 산 셈이다. 우리가 산 책들은 대부분 2~5달러 사이의 책이었고 간혹 7달러 짜리도 있었다.
미국의 서점 문화는 독특해서 많은 서점이 거의 도서관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다. 또 여기는 카페이기도 하니까 차와 음료,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카페의 잘 진열되어 있는 책들 사이 좌석에서는 토론하는 사람들, 무언가 글을 쓰는 사람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소호의 문화예술인들도 자주 찾는 곳이라는데, 내가 얼굴을 봐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곳에서는 종종 문화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이 북카페는 '하우징 웍(Housing Works)'이라는 시민단체가 운영하고 있다. 북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원봉사자. 급여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카페의 수입 정도에 대해 물었더니 홈페이지에 재정보고서가 있다고 참고하라고 일러준다.
카페의 수입은 기부받은 책들의 판매대금·음식제공 비용과 카페 회원 가입비(연간 15달러) 등이다. 나에게도 계산할 때 회원가입하면 더 할인해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수익금은 뉴욕의 홈리스들을 위해 쓰인다. 한국으로 치면 아름다운가게의 서점판이라고 할까?
삼청동 북까페와는 개념부터 다르다
자원봉사자가 말한대로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하우징 웍은 1990년에 설립됐다. 3만0000명이 넘는 뉴욕의 홈리스들에게 적절한 주거와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시민단체다.
특히 이들은 뉴욕의 홈리스들의 에이즈 예방과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 결산은 4천만달러가 넘는데, 의료센터를 운영하면서 메디케어(미정부의 저소득층의료보험)로부터 오는 수입, 하우징 웍이 운영하는 중고물품 경매 가게, 북카페에서 들어오는 수입, 모금 등으로 예산을 충당하고 있다.
홈리스들에게 마련해 준 주거공간의 운영과 재교육프로그램, 뉴욕 곳곳에 있는 홈리스들을 위한 의료센터 운영, 캠페인과 로비를 위한 애드보커시 파트, 북카페와 같은 부설 비영리기업 운영 등으로 상근자만 495명(2006년 현재)이다. 자원봉사자의 경우에 북 카페에는 80명, 경매 가게의 경우 95명이 일하고 있고, 부분적인 자원봉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수천명에 이른다.
상근자의 45%가 아프리카 아메리칸이고 26%가 라티노, 24%가 화이트, 4%가 아시아태평양, 1%가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미국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하우징 웍이 운영하는 기관 중에 이 북카페를 다녀간 한국 사람들도 제법 되는 것 같다. 이 카페를 보고 감동받았다는 어떤 분은 아예 북카페를 차렸다고 한다. 인터넷을 뒤져서 그 북카페를 찾아가 봤다. 그 분은 어떤 사회적 소명을 위한 북카페를 만들었을까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집안의 생계가 달린 북카페였다. 전혀 개념이 다른 북카페였다.
문화공간, 재활용 공간, 시민운동 공간...
서울에 있을 때 자주 찾던 북카페가 있다. 삼청동 입구에 있는 그 북카페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소호거리의 북카페를 보고 나니 거긴 카페에 책이 좀 많은 정도이지, 북카페라고 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우징 웍의 북카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공간이자, 중고책을 중심으로 판매하고 있는 재활용운동이다. 또한 홈리스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다는 점에서 카페는 그 자체로 운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서 보았던 북카페와는 개념이 다른 것이었다.
운동이 다양하게 뻗어 나가면 이렇게 일상이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뉴욕 소호거리 구석 한 편에 있는 북카페. 소호거리를 거닐다가 다리가 아파 쉴 때 쯤이면 스타벅스 대신 이 카페를 찾아가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