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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째(12월 10일), 난설헌을 추모하며 걷다

▲ 경포해수욕장. 추우면 어떠리? 푸른 너울을 보며 바닷바람을 맞으니 머릿속이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 이동환
▲ 바다 가운데, 작은 몸으로 수천 년 너울을 이겨낸 오리바위.
ⓒ 이동환
▲ 경포호수를 한 바퀴 돌아봤다. 멀리 경포대가 보인다. 저기서 소주 한 잔 했으면.
ⓒ 이동환
엿새 째 여행. 몸은 곤하지만 오히려 정신은 맑다. 새벽에 일어나 강릉터미널까지 버스를 탄 뒤 허난설헌 생가까지 왕복 걷기로 작정했다.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날씨 탓에 옹송그리며 걷기 시작했는데, 오죽헌 지나 선교장 거쳐 경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애들 기분으로 자전거 빌려 경포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허난설헌 생가까지 걸어갔다. 그의 혼 끄트머리라도 만난다는 기쁨에 걸음이 재다.

조선 중기 천재시인 허난설헌(1563~1589).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이다. 남편의 심한 외도와 핍박뿐인 시댁 살이, 친정의 몰락과 세 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 시로 한을 달래던 여인. 그는 스스로의 예언대로 선조 22년 3월 19일, 27세에 요절했다. 야사에 따르면 들보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도 한다.

조선이 아니라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노벨문학상을 타고도 남았을 터. 그의 생가를 더듬어 걷는 길. 30여 년 동안 간직한 그에 대한 존경과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 하는 나. 어줍은 솜씨나마 오늘은 실명소설 짧게 한 편 올리고자 한다. 난설헌이 죽던 날을 송구한 마음 담아 상상 속에 침잠해 그려본다.

실명소설,<핏빛으로 우는 새>

▲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 터.
ⓒ 이동환
"아씨! 뭔 일로 안 가신다 한데여?"

난설헌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외로 돌린 채 그는 석상처럼 미동도 안 했다. 가끔, 방바닥으로 늘어진 저고리 고름을 엄지로 희롱할 뿐이었다. 삼월이라지만 바깥바람은 뼈를 팠다. 언제 불을 땠는지 방바닥이 냉골이었다. 월례는 구들장을 이리저리 훑어 만지다가 다시 난설헌을 쳐다보았다.

"아씨! 뭔 일 있대여? 코 흘릴 적부터 아씰 모셨소. 지헌티 말 못 할 일이 뭐래여? 안방마님두 허하셨는디 이럴 기 뭐래여? 밖에서 응서방 거시기 떨어져여. 야그는 가면서 하자구여. 가마꾼들 번즉 어깨끈 매구 허리 빠진다니까여?"

황감(?)하게도 윤허된 친정 나들이. 버선발로 춤 출 일이지만 난설헌의 낯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해가 중천을 가르는지 창호에 어리던 댓잎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난설헌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스쳤다. 월례는 아씨의 바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언뜻 보았다.

"월례야! 내 말 단단히 새겨 듣거라. 나는 안 간다. 자식 셋 먼저 보내고 죄 많은 내가 무슨 낯으로 친정엘 간단 말이냐?"
"그러기 친정서 추스르자는 거 아니에여? 아씨, 여그 이렇게 계시다간 병난다니까여. 설마…, 서방님 땜에 그러는 거 아니지여?"

"그깟 서방인지 남방인지 관심도 없다. 무녀리 같은 인사, 기방서 서툰 붓 꺼내 웬 계집 치마폭에 첨화(添花)하든 말든 이녁 가슴 이미 다 식었다."
"그러믄 툴툴 털구 얼른 일어나 갑시다, 아씨, 예?"

월례는 거의 울상이었다. 한 식경이 지나도록 말씨름을 하면서도 도통 알 수 없는 아씨 속내에 가슴이 답답했다. 속을 후벼 다 보여주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당부만 주마. 친정에 돌아가거든…, 교산(남동생 허균의 호)에게…, 반드시 전해라. 내가 남긴 시첩(詩帖) 다 불태워 달라고!"

@BRI@월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설헌이 묵향과 시를 얼마나 중하게 생각하는지 다 알기 때문이다. 시 한 수 내리려면 애무하듯 묵향을 맡고, 귀밑에 송골송골 땀이 배도록 붓끝 한 자 한 자, 혼신을 쏟는 난설헌이었다. 그런 그가 시첩을 불태워 달라니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했다.

"아씨 설마…, 이상한 맴 잡숫는 건 아니지여?"
"걱정마라. 싫든 좋든 출가외인이다. 안채서 허하셨다지만 사대부가 여인이 먼 길 쉽게 나서는 거 아니다. 여기서 몸 추스르고 그냥저냥 살련다. 그깟 시 따위 다시 안 쓰고 모두가 원하는 사대부가 여인이 되어보련다. 그래서 그러는 거니 괘념 두지 마라."

그래도 월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한 식경을 더 보낸 뒤 난설헌 입가에 억지로나마 꼬들꼬들 웃음이 배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월례는 하직인사를 올렸다.

내생도 조선이라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

중천을 지르는 줄 알았던 해가 어느새 서녘을 가르고 있었다. 난설헌은 가슴께를 파고드는 바람 따위 아랑곳도 없이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덧없다. 저 새는…, 무슨 샐꼬?"

넋 나간 듯 하염없이 하늘만 보던 그의 눈언저리가 젖기 시작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아래를 물린 뒤 그는 사방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어름어름 땅거미가 창호에 뱄다.

"내생도 조선이라면, 또 여자로 살아야 한다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

시집올 때 해온 궤짝을 죄다 헤쳐 방바닥에 늘어놓고 그는 광목을 찾아 들보에 걸었다. 빈 궤를 방 가운데 놓고 버선을 벗어 던졌다.

궤에 올라서니 갑자기 죽은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어미 젖 한 번 못 물고 뱃속에서 죽어간 셋째 아이도, 먼저 간 친정 오라버니도…, 환한 얼굴로 손짓하는 듯했다. 미련 없이 광목 겹겹이 목에 두르고 나니 차라리 따뜻했고 홋홋했다. 비로소 난설헌의 낯이 밝아졌다.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창호에 어렸다. 언뜻…, 꿈속처럼 한 쌍 그림자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꿈을 꾸지 싶었다.

<곡자(哭子)>
자식을 가슴에 아무리 파묻어도….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 지난해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 올해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 슬프고 슬픈 광릉 땅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이 일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 불 반짝이는데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 지전을 태워서 너희 혼을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 네 무덤에 맑은 술을 올린다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 그래 안다, 너희 남매 혼이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는가
浪吟黃坮詞(낭음황대사) -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 피눈물 나는 서러운 울음 삼키고 있네 / 許蘭雪軒

덧붙이는 글 |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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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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