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한다면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가가 아닐까 싶다. 읽고 싶어서 사는 책도 있지만 짝을 맞추기 위해 사는 책이 더 많으니 말이다.
꼭 시리즈로 나오는 책이 아니라도 나름대로 짝이 맞을 성 싶으면 함께 갖춰야 직성이 풀린다. 같은 책이 여러 판본으로 나온다면 이것 역시 손에 넣지 않고서는 참기 어렵다. 주제별, 작가별 또는 출판사별 심지어 판형으로 나누어 책을 진열하고는 그것을 즐기면서 커피 한 잔 하는 것이 끔찍이도 좋으니 수집가가 맞는 것 같다.
변명을 하나 달자면 책을 수집하는 것은 책 읽는 하나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작가나 주제에 관심이 쏠리면 집중적으로 관련 책들을 모아 나가기 시작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구해 놓은 책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해당 분야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고양이 빌딩인가를 지어 놓고 책에 파묻혀 산다는 다치바나씨도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지 싶다.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만화책들은 기존 장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녀석들이다. <살아 있는 목>, <파란 말>, <살육시집>, <밤의 물고기>, <무언가 마을로 찾아 온다> 같은 알듯 모를 듯 한 제목들에 표지도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지 기괴하다 해야 할지 대략 그런 그림들로 꾸며져 있다. 무섭지는 않고 괴담과 환상 사이에 있는, 일본의 다른 책 이름을 빌리자면 기묘한 이야기쯤 되려나?
시오리와 시미코가 사는 마을에는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섞여 지내는데 현실과 꿈, 인간 세계와 다른 세계의 경계에 그리 개의치 않고 지낸다.
시미코네 집이기도 한 우론당이라는 헌 책방과 같은 동네에 사는 단 선생님이라는 작가를 중심으로 글과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책으로 위장하고 사람을 삼키거나 활자를 먹는 물고기인 책 물고기들도 등장하고 헌 책방 주인들을 노리는 헌 책 마니아 유령들이 진을 치고 있는 헌 책 지옥도 있다.
헌 책방과 일본
죽어서도 헌 책방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도 하나 등장하는데 유령이라 다리가 없는 탓에 무한정 서서 공짜 책을 즐긴다. 우중충한 분위기로 서점 분위기를 흐리니 빗자루로 쓸어도 보지만 근성 있는 유령이라 쉬이 물러가지 않는다. 유령이 생전에 추리소설 마니아라는 것을 알아낸 시미코는 유령이 책을 집어들 때마다 쫓아다니며 결말을 말해 버리니 가려한 유령이 제풀에 사라지는 대목도 있다.
책 많이 읽기로 유명하고 책값 비싸기로도 유명한 일본이다. 그러다 보니 헌 책방도 발달해 있다. 저렴한 신간을 찾는 사람부터 희귀본을 구하는 사람까지 헌 책방은 쓸모도 많다. 일본은 도서정가제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나라다.
그 대신 반품 역시 수월하게 보장된다. 동네 작은 서점이라도 소신 있게 책을 가져다 놓을 수 있다. 학급 문고와 같은 공공 부문 수요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서 상업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책들도 이 시장을 바라고 진지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
일본 사정을 늘어놓아 본 것은 우리를 견줘보기 위해서다. 인터넷 서점의 가격 할인을 둘러 싼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출판사의 대형화와 계열화, 인터넷 서점으로의 집중, 생활 실용 서적 강세 등 몇 가지 쏠림 현상들은 여전하다. 오히려 몰아치기 마케팅으로 단기간에 승부를 보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고 좋은 책은 살아남는다는 얘기도 믿기 어려운 시절이다.
한 동안 TV가 나서 책을 읽자는 캠페인을 벌어야 할 정도로 독서하는 기풍이 없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지하철에선 휴대폰이나 PMP가 대세고 논술을 위한 독서는 요령으로 치닫고 있다.
책을 권하고 책을 읽는 문화, 작은 출판사라도 소신을 갖고 좋은 책을 낼 수 있는 장치, 몰아치기 마케팅과 밀어주기 서평을 극복하고 냉정하게 책의 가치를 드러내는 마당이 필요하다. 도서관과 학급 문고 등 공공영역에서 안정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는 것도 좋은 방편일 것이다.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는 2002년에 출간되어 이상하다는 사람이 대부분 이었고 좋다는 사람이 조금 있었는데 이내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 책 뒷면에 '노약자나 임산부는 구독을 금합니다'는 엄한 문구가 들어있던 것이 이 시리즈의 운명을 예고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수집가의 감각이 발동해 이 시리즈를 구해놓고 뒤늦게 사람들이 이 책들을 찾을 때 수집가의 음험한 웃음을 지었는데 이번에 다시 출간되었다.
속내를 드러낸다면 재미있는 책을 함께 나누게 되어 기쁘기 보다는 독점 소장의 프리미엄이 무너져 안타깝다는 게 수집가의 얄팍한 심보겠지만 소문은 들었으나 이 책들을 접하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
수집가의 감각으로 충고를 드린다면 관심 있으시다면 서두르시는 게 좋지 않을까? 대량생산의 시대라지만 길게 보면 모든 책은 한정판이고 특이한 책이라면 그때가 성큼 다가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