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의 앞뜰에는 무덤 앞에서 가져온 석물들이 있다. 비석을 비롯해 망주석·장명등·문인석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서있는 이 석물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촬영장소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도 있어서 나름대로 박물관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처럼 이 비석들을 살펴보다가 조선 선비들의 사대주의 사상의 일면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조선 후기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에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란 글귀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빛나는 조선국'이 아니었네?
'유명조선국'. 오래 전부터 많이 보아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 '조선' 또는 '조선국'이라 하지 않고 '유명(有明)'이란 수식어를 붙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밝은' '빛나는' 정도의 평범한 수식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부터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말은 '명나라의' '명나라에 속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유명조선국'은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명의 속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 안타까운 조선의 처지여.
그렇다고 조선시대를 한심하게만 볼 수는 없다. 당시 명나라는 현실적으로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그 막강한 힘으로도 그렇고,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당시의 지리관으로도 그랬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 명나라는 이미 수십 척의 배로 대함대를 편성해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했을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은 힘이 곧 정의요, 그들의 입장이 곧 질서이다. 따라서 맹목적인 저항은 화만 부를 뿐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강대국 명에 인접해 있는 조선으로서는 이에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나라로서 어쩌랴, 이것이 현실인 것을.
문제는 이런 상황에 얼마나 주체적으로 대응했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상황에 비교적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은 명과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공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정책이었다. 약소국 조선이 사대(事大)를 하는 형식으로 강대국 명나라의 명분을 살려준 것이다.
다소 비굴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국왕의 책봉을 받아야 했으나 정치적 간섭은 받지 않았다. 또 조공을 바치면서도 답례품을 받아오니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교과서에서는 이를 조공무역이라고 하며 실리외교라고 평가하고 있다.
강대국 명은 기본적으로 주변국가와 일대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현실을 인정하며 실리를 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성리학의 '이소사대(以小事大,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어 조선 지배층의 일종의 철학이자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전근대 중국 주변의 외교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 역시 그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러다 보니 비석에 조차 우리나라의 국명을 표기할 때 '유명조선', 또는 '유명조선국'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구태여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까지 이런 식으로 표기해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중국과 외교를 할 때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내부에서 조차 이렇게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대에서 사대주의로
문제는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명나라 말 만주족이 후금(청)을 세웠을 때, 광해군은 명과 후금 두 강대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약소국인 조선이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세력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쿠데타에 의해 쫓겨난 광해군의 주된 죄목은 바로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의 나라와 소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즉, 인조와 서인세력은 후금(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보아 배척하고, 오로지 기울어가는 명에 대한 사대만을 내세우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은 청의 침략을 받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지배층과 선비들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으며, 이미 망해버린 명에 대한 사대의 생각만은 버리지 않았다. 이쯤 되면 '사대'라기보다는 '사대주의'라고 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청의 선진문물의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세는 명에 대한 의리의 강조였다. 나아가, 명이 망했으니 이제는 조선이 정신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소중화 의식이 싹트기까지 했다.
그 의지의 올곧음은 대단하지만, 실제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대주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현실을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생각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조선 후기의 비석에도 여전히 '유명조선국'이라는 글씨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연호를 표기할 때에도 공식적인 기록에는 반드시 청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청의 시야 밖에 있는 비석 등에는 여전히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로 시작되는 연도 표시 방법이다. 이미 망해 버린 명의 연호를 변칙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본 비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숭정기원후 5신미(崇禎紀元後 五辛未)' '숭정기원후 3갑신'이라고 되어있었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1628~1644)의 연호이다. 따라서 '숭정기원'은 1628년이다. '5신미'는 '숭정 기원후 5번째 돌아온 신미년'이라는 뜻이니 1871년을 말한다. 명이 망한지 무려 200여 년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맹목적인 사대주의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더 유감스러운 것은 근처에 식민지시기에 세워진 조선 왕족의 비석을 보니 '소화(昭和)'라는 일본 연호가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 오랜 생각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흔적, '대명천지(大明天地)'
사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의 지나친 사대주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를 들어 보자. 다름 아닌 바로 '대명천지'라는 말이다.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에는 만동묘라는 곳이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에 도움을 준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이미 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조선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이 근처에는 송시열이 새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글귀가 있다.
'대명천지'란 말은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이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밝고 환한 세상'을 뜻한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큰 명나라의 세상' 즉, '명나라가 중심이 된 세상'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토록 꿈꾸던 중화 명나라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숭정일월'도 비슷한 뜻으로 해석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가 '숭정'이다. 그러니 결국은 두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대명 황제가 다스리는 밝고 환한 세상을 꿈꾸며 쓴 말인 것이다. 이쯤 되면 그들의 사대주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주의 경천대에도 이 글귀가 쓰여 있다.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들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볼 수 있으니, '대명강산(大明江山)', '대명산수(大明山水)' 등 조선후기의 선비들이 자주 사용하던 용어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말자는 명분론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국을 차지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며, 조선 말기 서양문화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론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해석되고 있다. 명분에 집착해 현실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결국 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지키려는 이런 모습들을 지조와 절개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친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오직 명에 대한 지조와 절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선후기의 대부분의 비석에서 보이는 '유명조선국'등의 글귀나, '숭정기원후'로 시작되는 연호 표시는 바로, 이들의 머릿속에 너무나 깊게 뿌리박힌 한심한 사대주의의 흔적인 것이다. 명은 이미 망했는데 여전히 '명에 속한 조선'이라니.
약소국으로서 국가의 보전을 위해 강대국과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가급적이면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들에게는 명분을, 자국에는 실리를 가져오는 것이 외교의 바른 길일 것이다.
지나치게 강대국에 의존하고 정신마저 빼앗길 정도로 사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문제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대주의 사상은 지금도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다. '대명' 대신에 새로운 우상인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얼마 전 전시 군사작전지휘권을 둘러싼 문제에서도 일부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명조선국' '대명천지'의 망령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는 그 실체는 인정하되, 맹목적인 '숭미(崇美)'의 망령을 떨쳐버릴 때라는 것을, 비석에 쓰인 '유명조선국'은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백유선 기자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