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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눈 온다"라고 날아온 문자메시지 한통. 그냥 또 찔끔거리는 눈이겠거니 생각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껌을 질겅거렸던 나는 화장실에 가는 도중 문득 쳐다본 회사 복도 창문 앞에서 약 3초간 얼어붙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쏟아지는' 눈이었다. 하염없이 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함박눈'.
강원도가 고향인 나는 어렸을 적 하도 눈을 많이 봐서인지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12월 초순부터 무려 4월 중순까지 폭설이 계속되는 영동지방에서 눈을 좋아할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한 손에는 가방을 한손에는 삽을 들고 회사까지 길을 만들며 가야 하는 아버지 출근길 정경이 낯설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딱 한번 눈의 수혜를 입은 적이 있다면 중학교 1학년 봄, 어른 키보다 더 높이 쌓인 눈 덕분에 강릉 시내 전체에 휴교령이 내린 적이 있었다.
개학을 한 지 얼마 안 된 3월 중순에 내린 눈이 이때는 퍽이나 고맙게 여겨졌었다. 동네 친구를 만나려면 "누구야" "응, 나 여기야~"를 외치며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오로지 감각으로 서로의 위치를 알아내야 했던 우리. 나는 그렇게 12개월 중 1/3을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눈과 함께 보내야만 했다.
겨우 그 눈이라는 녀석에게서 벗어나는가 싶었던 대학시절, 하지만 고향을 통째로 옮기지 않는 한 눈의 손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 그 무렵도 물론 4월이 일주일가량이나 지난 완연한 초봄이었다. 하지만 횡계 방면에 들어서면서부터 불길하게도 허연 서리가 점차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가 싶더니 휴게소에 내리자마자 또 흩날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의 고지인 대관령에서는 눈의 행패가 극에 달했다. 온통 눈에 덮인 대관령 천지. 정체된 자동차들은 움직일 줄을 모르고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더니만 심지어는 한치 앞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만큼 어둠이 깔렸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터미널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눈에 푹푹 빠지는 다리를 힘겹게 옮기며 집을 향해 가야만 했다. 얼핏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히말라야인가 어딘가를 정복하기 위해 폭설을 헤치며 산을 오르던 대원들, 동상이 걸려 발가락을 자르기도 하고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아비규환의 재난영화였는데. 아. 내 꼴이 꼭 그 꼴이군. 차라리 여기가 히말라야였다면 묵묵히 상황을 받아들이련만 집까지 눈밭을 헤쳐 가는 나의 심경은 처참했다.
그렇게 20년이 넘게 그 눈이라는 놈에 학을 떼었던 나건만, 글쎄 올해 눈은 조금 남달랐다. 근래 서울에서 눈다운 눈을 보기 힘들었던 까닭일까? 나는 눈에 대한 그 안 좋은 기억들을 죄다 잊어버린 채 한 폭의 그림같은 영상에 매료되어 얼어붙어 못했다.
"이거, 정말, 펄펄 내리는 눈이네?" 혼자 창문에 팔을 괴고 앉아 생각하면서 그 꼴보기 싫던 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약간 슬픈 마음도 들었다. "눈이 온다" 메시지를 받고도 의자에 딱풀이라도 붙어있는 마냥 움직이지 않는 내 엉덩이는 그만큼 무뎌진 내 감성을 의미할 테지. 게다가 회사 창문에서 처음 이 광경을 발견해야 했던 현실도 왠지 서글프다.
그것도 29살에서 30살로 넘어가기 직전인 바로 올해 겨울에 말이다. 최근 들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을 유난스럽게 앓고 있는 나는 이 눈이 혹시 이 세상의 마지막은 아닐까 하는 오버된 감성에 빠져 못내 아쉽고 서글펐다.
일을 마치고 소복이 쌓여가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내보았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 여의도 공원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 준비되어 있었다. 눈밭에 폭하고 감긴 채 나는 흩날리는 눈발들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눈아, 너 참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