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뉴스쿨이라는 대학을 소개한 적이 있지만 뉴욕에는 또 다른 독특한 대학이 하나 있다. 아마 건축이나 미술, 공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들어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알아주는 명문대학으로 쿠퍼 유니온(Cooper Union)이라는 곳이다. 4년간 학비를 전액 장학금으로 주는 탓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오지만 전교생이 1,000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입학인원이 적어서인지 들어가기 쉽지 않은 학교다. MIT보다 좋다고 알려져 있는 대학이다.
4년 전액 장학금인 이유
@BRI@체육관과 도서관이 없어서 인근의 대학들과 연계해 사용하고 있지만 이곳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은 해마다 넘쳐난다고 한다. 4년간 전액 장학금이라는 제도가 매력적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하기 힘든, 그야말로 공부에 전념하게 만드는 대학이기 때문이란다.
1859년에 설립된 이 학교가 왜 4년간 전액 장학금이라는 제도를 택했을까? 또 어떻게 가능했을까? 거기엔 설립자인 피터 쿠퍼(Peter Cooper)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터 쿠퍼는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이자, 기업가이기도 하다. 1876년에는 그린벡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다.
그린벡당은 화폐발행증가를 목표로 내건 농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당이다. 남북전쟁 이후 링컨이 전쟁공채로 발행한 그린벡 화폐의 남발이 물가폭등을 가져오자 그랜트 행정부가 통화를 환수하면서 물가가 하락했다. 당시 그 피해가 가장 컸던 농민들이 반발하면서 만들어진 당이다. 또 여성참정권 인정 등 진보적인 정책을 내걸기도 했다. 실제 하원의원 선거에서 21명을 당선시키는 등 작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보였다.
피터 쿠퍼는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로 미국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드는 등 발명가로 이름이 높았고, 철강산업으로도 성공했으며, 최초로 대서양에 케이블을 놓아 유럽과 소통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발명가로서도 이름 높았고, 사업으로도 성공하여 돈을 벌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했다. 이쯤되면 현대 고 정주영 회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듯하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번 것과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 자신은 그리 교육의 혜택을 받지 않고 어려서부터 일을 했다는 것 등은 비슷할지 몰라도 번 돈을 사용하는 지향과 의미는 전혀 달랐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로 나선 동기도 다르다. 쿠퍼의 삶을 들여다 보면 단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돈을 썼는지가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정주영과 피터쿠퍼가 다른 점은
쿠퍼 유니온이 전액장학금으로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것은 애초에 이 학교를 설립한 쿠퍼가 시작한 것이었고, 그 전통이 지금껏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쿠퍼가 이 학교의 학비 전액을 장학금으로 한 것은 그가 처음부터 이 학교를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을 위해 세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늉만 내는 학교가 아니라 오늘날 최고 명문대학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처럼 ‘제대로’ 공부 시킬 생각으로 만든 대학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공립학교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소수자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남달랐다. 그는 인디안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그린벡당(Greenback Party)의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한 것도 농민들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코자 함이었다. 정주영처럼 자신의 돈으로 당을 만들고 자신의 직원들을 데려다 당직자를 만들어 마치 다른 사업 하나 더 하는 것 같은 모양으로 ‘정치’에 뛰어 든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가 자식에게 남긴 재산은 하나도 없다. 자식들 또한 왕자의 난이니 하는 상호간의 분쟁도 없었다. 특히 박애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은 오늘도 쿠퍼 유니온 대학 앞에 서 있는 그의 묘비석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쿠퍼 유니온 대학 그 자체가 흔적일게다.
돈을 벌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고스란히 보여 준 그의 선구적 활동 탓인지, 그 이후 미국의 거부들로 이어지는 카네기며, 록펠러며 오늘날의 빌 게이츠까지 제대로 된 부자란 ‘최소한’ 이렇게 돈을 써야 한다는 전통을 잇게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돈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도 물론 유한양행의 유일한이란 사람이 있다. 지금 유한대학이 어쩌면 유일한씨가 미국의 쿠퍼 유니온을 꿈꾸며 세운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까지 라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유일한을 제외하고 해방 이후 적지 않은 거부들이 명멸해 가고 있지만 피터 쿠퍼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자식들간의 분쟁과 갈등은 간혹 거대한 회사 자체를 풍비박산 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돈’에 주린 사람들이 걸신들린 것 마냥 돈을 ㅤㅉㅗㅈ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피터 쿠퍼에게는 대학을 세운 것이 자선이 아니었다. 그의 신념과 확신이었고, 철학이었다. 천민적 행태로 부를 일궈 세운 우리나라의 자본가들에게는 신념과 확신, 철학도 돈으로 포장되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또 자신의 주변에 세운 대학과 재단이 대개는 자신의 위세를 높이는 수단이상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돈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이 없는 현실에서, 부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거두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 새삼 쿠퍼 유니온 대학에 서려 있는 피터 쿠퍼를 돌아보게 된다.
그가 죽고 나서 그를 설명한 문구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쿠퍼 유니온 대학과 관련지어 본다면 이런 문구가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자계급의 향상이 삶의 거대한 목적이었던 사람, 세상이 아는 것처럼 그의 시간과 돈을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바쳤던 사람이 여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