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벌써 열 돌을 맞은 서울국제노동영화제(지난 11월 16일부터 19일)에서는 해설자도 가벼운 배경음악도 하나 없이, 공장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된 독특한 다큐멘터리 영화 <5개 공장>(5-Factories : Workers Control in Venezuela)이 상영된 바 있다.
영화는 노동자 자주관리로 운영되는 베네수엘라의 다섯 공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06년, 바로 올해 제작된 따끈따끈한 이 영화처럼 새로운 경제 모델을 세우기 위한 실험이 베네수엘라에서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오래고 노조 조직률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함을 자랑하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착수해보지 못한 초유의 실험이다.
'공장 속으로(Fabrica Adentro)'라고 불리는 베네수엘라의 공동경영 프로젝트는 현재 595개 민간 기업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그 중 120여개 기업이 공동경영 기업으로 점차 발전하고 있다. 영화가 다루는 다섯 개의 공장은 그 가운데 이미 공동경영이 정착단계에 들어간 선도적이고 모범적인 공장이라 할 수 있다.
기업경영 노동자가 주도하고... 지역민도 참여
@BRI@공동경영 도입은 두 가지 경로로 진행되고 있는데, 하나는 국유 기업을 공동경영 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휴 공장을 인수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기업이 국유 전력회사인 카다페(Cadafe)다. 이 회사는 2002년 자본파업에 경영진이 참가함에 따라 기업 경영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공장 폐쇄 직전인 2002년 12월, 노동자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직접 기업의 보안 계획을 세우면서 기업 운영에 노동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이후 2003년 4월부터 공동경영이 실질적으로 정착되었고 정부의 지원과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생산과 투자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인베발(Inveval)을 들 수 있다. 밸브를 생산하는 이 회사는, 소유주가 2002년 12월 9일부터 공장 폐쇄 조치를 취하고 체불 임금 지급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2003년 3월부터 회사를 점유하고 약 2년 동안 자체적으로 생산하면서 투쟁하게 된다.
정부는 소유주에게 신용을 제공할 테니 공장을 재가동하라고 설득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의회의 만장일치 결의를 통하여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주고 2005년 4월 국유화 조치를 취했다.
정부가 51%의 지분을,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은 투자 형태로 전환되어 노동조합이 49%의 비율로 주식을 보유하며 노동자 선출 대표와 정부 파견 경영진이 공동으로 경영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공동경영 도입의 주요한 동력은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2003년 자본파업을 전후하여 PDVSA와 카다페를 비롯한 많은 기업에서 경영진이 폐쇄한 공장을 노동자 스스로 생산 시설을 복구하고 운영한 경험이 공동경영의 실현 타당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카다페의 자회사인 칼데라(Cadela)의 경우 약 80~90%의 비율로 노동자들이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본사에서 임명하던 경영진들도 노동자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 노동자 고용의 경우에도 노조가 결정권의 75%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노조의 부정부패 사례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동 경영이 모든 기업에서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각종 좌우 편향이나 경험 부족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알루미늄 생산 기업인 알카사(Alcasa)의 경우 처음 공동경영을 도입했을 때, "회사를 버리고 도망친 모든 간부와 이사들을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 노선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회사의 CEO인 게릴라 출신의 카를로스 란스 대표는 2000여명의 경영진을 일시에 해고하여 기업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던 국영 석유기업(PDVSA)의 사례를 들어 완강한 간부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공동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회의, 유인물, 신문 그리고 토론 등을 통하여 몇 개월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이 기업에서 권력을 얻는 것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부합됨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점차 공동경영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노동자와 경영진뿐만 아니라 지역의 협동조합들도 '공동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7월 칼데라사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경비, 청소, 계량기 확인, 청구서 전달 등 기업의 외주 사업에 약 575개의 협동조합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기업은 협동조합 조합원들의 교육을 위해 인근의 야노스 대학과 연대하여 기술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기업의 지역 사회에 대한 적극적 책임성을 보여주는 이런 사례는 공동경영이 단지 해당 기업 내의 민주주의와 노동자 권리 신장 차원을 넘어서고 있음을 입증한다. 베네수엘라가 지향하는 '자본의 증식이 아니라 인간의 발전을 위한 경제', '연대성에 기초한 사회적 경제'는 정부의 구호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하부 기초 단위를 이루는 기업 단위에서부터 관철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200배로 늘어난 자주관리 협동조합
공동경영이 일정한 규모 이상의 제조업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방식이라면, 제조업 기반이 약한 베네수엘라에서 일하는 국민 다수가 참여하는 대표적 경제 자주관리 방식은 협동조합이다. 소규모의 공장이나 가내 수공업, 농장, 서비스 사업 등에 존재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자주적인 생산 연합을 구성하고 있다.
공동경영이 기존 자본가나 경영진 중심의 공장을 노동자의 자주적 관리로 바꿔나가는 과정이라면, 협동조합은 그 출발부터 자주관리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노동자, 농민, 중소 상인 등 일하는 국민들은 협동조합을 구성하는 순간부터 자신들이 만든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오너가 된다. 회사의 목표와 계획, 생산과 분배까지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차베스 정권하에서 활성화 되고 있는 이러한 자주관리적 협동조합을 이전 형식적 조합과 구분하여 볼리바리안 협동조합이라고 부른다. 차베스 집권 이전 협동조합 수는 762개에 불과했으나 이후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15만3000개의 협동조합에 150만 명의 농민과 노동자가 참여하고 있다.
볼리바리안 협동조합은 5인 이상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의 생산 연합체 형태이며 매주 수백 개씩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5년을 기준으로 전체 노동력을 1230만 명이라고 할 때, 협동조합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를 넘게 된다.
협동조합의 파상적 증가는 2004년 3월부터 실시된 미션 뷸반 카라스(Mission Vuelvan Caras)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미션은 자신의 힘으로 협동조합을 형성하여 실질적으로 생산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실업과 소외의 문제와 직접 투쟁하도록 기획된 직업교육이다. 미션에 참여한 학생들은 대부분 실업자이거나 미숙련 임시직 고용자들이다.
직업교육을 통해 2004년 12월부터 2005년 5월 사이에만 26만4570명의 학생이 기술, 경영의 주제에 대하여 반년 혹은 1년 단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학생들은 매월 100달러의 장학금을 받고 의료와 주거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기회 또한 보장받는다.
직업교육을 이수한 학생들은 자유롭게 직업을 찾거나 기업을 운영할 수도 있으나,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협동조합은 우선적인 선호대상이었다. 2005년 졸업생의 70%인 19만5095명이 7592개의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내생적 발전지대의 체계적 지원
2004년 수도 카라카스 서부에 문을 연 파브리시오 오제다(Fabricio Ojeda) 내생적 발전 센터(Endogenous Development Nucleus)는 차베스 정권이 베네수엘라 협동조합 모델을 탐방하러 오는 외국 손님들에게 주로 소개하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군부독재와 싸우기 위해 지위를 포기하고 게릴라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966년 감옥에서 사망한 베네수엘라의 저널리스트이자 혁명가 파브리시오 오제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이곳은 의류와 신발을 제조하는 협동조합생산시설과 도서관, 컴퓨터 센터 등 다양한 문화 복지 시설들이 함께 들어선 복합 자치 공간이다. 매연 날리는 거리에서 하루 종일 노점상이나 잡역을 하며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던 카라카스의 도시 빈민들에게 이곳이 제공하는 휴식과 의료지원, 교육, 정보는 삶의 희망과 의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내생적 발전센터의 기능과 규모를 키워 일종의 산업 클러스터 역할을 하는 것이 '내생적 발전지대(Endogenous Development Zones)'이다. 내생적 발전 지대는 제조업, 농업, 서비스업 그리고 각종 복지 시설들을 통합하는 곳으로 협동조합 클러스터라고 생각하면 크게 무리가 없다.
특히 직업교육 이수생에게 협동조합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복합적인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2005년 5월 기준으로, 960개의 협동조합에 2만7975명의 직업교육 이수생들이 참여하여 115개의 내생적 발전지대를 만들었다.
국민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자주적으로 직접 자신의 생계를 해결할 새로운 창업을 하거나 농장을 개척하고 정부는 미션과 금융지원, 내생적 발전센터 등을 통해 국민들의 자구 노력을 견고하게 뒷받침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사람을 지배하는 역사는 종식될 것인가
적어도 현재까지 베네수엘라에서 진행 중인 경제 체제의 혁명적 변화 과정은 많은 부분에서 청신호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네수엘라 경제의 주요 거시 지표는 2003년 자본파업 시기를 바닥으로 급속히 호전되고 있다.
지난 기사에서 살펴보았듯이 거시지표의 호전이 주로 비석유 부문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산업 불균형성과 과도한 석유 부문 의존이 시정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파업으로 2003년 한 해 동안 베네수엘라에서 76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으나 공동경영과 각종 협동조합 설립으로 실업률은 꾸준히 하락하고 있으며 올 한 해 동안에만 45만 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베네수엘라는 2012년, 2013년 이내에 국민 생활에 필요한 기본 상품을 100% 자체적으로 가공할 것이며, 자체적인 산업화 국가를 선언하겠다는 목표를 제기하고 있다. 미국의 뒷마당으로 대외 의존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던 남미 경제의 고질병을 치유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다.
베네수엘라의 공동경영과 협동조합은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물론 그러나 인류의 긴 역사를 생각할 때 그 귀추를 예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노동자의 자주적 경영은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가 정착된 이래로 노동운동가, 사회운동가는 물론이고 학자, 경영자들의 오랜 화두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임노동 관계에서 노동자는 노동생산물로부터 그리고 노동 과정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탁월한 관찰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 경영을 책임지는 자주관리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산업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창의성과 역동성을 높이는 이상적 방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었다. 자본주의에서도 사회주의에서도 지금까지 이상적이고 원론적인 노동자의 자주적 경영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스웨덴이나 독일이 실시한 공동결정 제도는 노동자가 회사 경영 전반에 동등한 지위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 사안에 대한 의사표시를 하는 정도에 그치는 제도였다. 그나마도 자본의 힘이 비대해지면서 한 발씩 퇴화하여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는 1980년대경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다. 자본의 양보나 타협을 통한 노동자 경영 참여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이들 사회민주주의 계열보다 강도가 센 실험이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유고는 1950년 6월 노동자 자주관리를 법제화하고 520개 기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성립되어 자주관리에 착수했다.
그러나 자주관리 기업들의 이기주의, 연방을 이루는 각 공화국들 간의 격차와 지역 이기주의 등 내부적 문제와 대외무역에서의 만성적 적자와 대외차관 의존성이 결합되면서 결국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잇단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와 운명을 같이하고 말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노동자의 완전한 경영과 자주관리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자본과의 타협이 아니라 비타협적 투쟁과 압도적 정치력의 우위로 출발했다는 점이 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과 크게 다르고 또 개별 기업과 지역적 이기주의를 극복할 장치로 사회적 생산 기업 개념과 경제의 연대성을 제도적으로 조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 유고슬라비아와도 확실한 차이점을 보인다.
과거 칠레 아옌데 정권 하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은 정부가 기득권층과 타협함으로써 위기를 겪고 최종적으로 미국의 개입과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민중적 혁명과 집권층의 강력한 혁명의지가 결합되어 있는 베네수엘라는 칠레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크지 않다. 이러한 점이 베네수엘라의 실험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한국에 비해 경제 규모도 작고 인당 GDP 수준도 훨씬 떨어진다. 베네수엘라의 케이스를 한국에 직접 대입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법론과 그 속에 흐르는 정신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시스템 실험은 신자유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며 최상의 생존 방식이라는 주류 이데올로기에 치명적 상처를 주기에 충분하다. 베네수엘라 국민과 차베스 대통령의 역사적 실험이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이 될 수 있기를 계속해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로 하자.
덧붙이는 글 | * 여경훈 기자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