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知 名曰孝生 字曰孝源 동지(同知)의 이름은 효생(孝生)이요, 자는 효원(孝源)이라...
......
其生也善 活人四隅 살아서는 선행을 하여 사방의 사람들을 살렸고
其死也哀 無子無女 죽어서는 슬프나니 자녀가 없도다.
吁 由此敬之 萬世...年 아! 이(碑)로 말미암아 공경할지니 만세(萬世)토록….
옹정(擁正) 2년(1724, 영조 즉위년)
임효생은 조선 숙종때 이 마을에서 살던 사람이다. 생존시에 마을과 주변 사람들을 구휼하는데 힘썼고, 죽어서는 남은 재산마저 모두 마을에 희사했다. 이러한 선행은 마을의 귀감이 되어 사후(死後)에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고, 동계에서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주게 되었다. 그의 재산은 마을 공동 재산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임효생은 평민이었고, 실제로 벼슬을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반이었다면 부인이 먼저 죽었더라도 사후에 증정부인으로 추증하는 교지를 내리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선행은 또 다른 선행을 낳고
200여년이 지나서 이 마을에는 제 2의 '동네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바로 '신상하'와 '조대장'이다. 신상하는 재산에 대한 등기부등본이 남아있어 일제시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역시 자손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조대장은 동네에서 대장간을 운영했다고만 알려져 있고 이름이 전하지 않아 후세에 '조대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두 사람 역시 동계원이었고, 죽어서 자신들의 재산을 동네에 기부하였다. 아쉽게도 두 사람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이것이 전부라고 한다. 하지만 두 분의 선행은 분명 동계와 임효생에게서 비롯된 "나눔과 더불어 삶"의 아름다운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임영국 동계(洞契)장님은 "현재 이분들이 남긴 재산은 부동산이 대부분이나 이로부터 발생되는 소득은 세 분의 추모사업과 마을의 경로사업, 효자·효부의 표창, 마을 청소년들의 장학금에 사용되고 있으며 추후에는 기념회관을 세울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눔과 더불어 삶', 대전 정신으로 큰 우물처럼 솟아나기를....
동계는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 생활 모습이었으나, 산업화·도시화의 물결속에서 이제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말과 글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준 잔잔한 마을 공동체의 미덕이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정동에서는 계속되고 있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고장의 미풍양속이며 훌륭한 정신적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임효생, 신상하, 조대장 등의 '나눔의 정신'과 대정동 동계의 '더불어 삶'이 한 우물처럼 맑고 큰 물이 되어 대전의 곳곳을 적셔주기를 소망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을이 개발되면서 임효생을 비롯한 6기의 묘가 논산으로 이장된 것이다. 다시 마을로 옮겨와 마을에서 묘역을 관리하며 그 정신을 살리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함께 참석했던 한밭문화마당 임헌기 대표는 한우물 동계를 대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나눔과 더불어 삶'의 정신을 계승하고 대전의 지역문화로 정착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한 사람·한 물건이 그 가치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문화재 대정동 동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문화재가 되어 그 정신을 계승하고 공유한다는 면에서 더욱 가치 있는 지역공동체 문화가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한우물 동계'와 '임효생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대전향토사료관 양승률 학예사와 한밭문화마당 임헌기 대표를 통해 2005년 이후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두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