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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볼협회 고문이신 우리 동네 노인회장님이 더 열심히 연습하라고 주셨습니다.
게이트볼협회 고문이신 우리 동네 노인회장님이 더 열심히 연습하라고 주셨습니다. ⓒ 김관숙
경기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 나는 뜻밖에 선물을 받았습니다. 게이트볼협회 고문이신 우리 동네 노인회장님이 팔목에 차는 게이트볼 경기용 전자계산기와 볼 두 개를 넣고 다니는 작은 가방을 주신 것입니다.

노인회장님이 전날(21일) 누군가에게서 새 전자계산기를 선물 받았기 때문에 사용하던 전자계산기를 내게 주신 건데 "내가 10년 썼어, 일제라구"라는 말처럼 숫자들이 거의 지워져 있습니다. 그래도 사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선물도 이런 선물이 없고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얼마나 기쁘던지 나는 당장 회장님 앞에서 왼쪽 팔목에 전자계산기를 차고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번호를 누를 적마다 삑삑 소리가 울립니다. 어쩐지 오늘 경기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경기를 할 때는 팔목에 차는 경기용 전자계산기가 있어야 합니다. 회원들의 볼이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그 회원의 번호를 눌러 점수를 저장합니다. 몇 번 회원이 몇 번째 게이트를 통과했는지도 알 수가 있고, 팀의 중간 점수도 총 점수도 알게 됩니다.

나는 아직 전자계산기를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계산기 값이 최하 4만5000원이나 되어 남편에게 먼저 사 주었습니다. 그런 내 처지를 회장님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작은 가방에는 딱 볼 두 개가 들어갑니다. 가방에는 꽤 오래 사용한 흔적이 있는 볼 두 개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기쁜지를 모릅니다. 혼자서 연습하고 싶을 때 간단하게 스틱과 그 작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 됩니다.

개회식이 다가오자 모여 들었습니다.
개회식이 다가오자 모여 들었습니다. ⓒ 김관숙
치열한 경기 중입니다.
치열한 경기 중입니다. ⓒ 김관숙
맞춤 도시락 밥이 꿀맛입니다.
맞춤 도시락 밥이 꿀맛입니다. ⓒ 김관숙
오늘 경기는 동호회원 송년 경기입니다. 한 동네에서 한 팀이 나와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 회원들이 모두 뒤섞여서 5명이 한 팀을 만들어 경기를 합니다. 해서 팀 중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 두셋 있게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서먹하지만 경기를 하다가 보면 곧 친숙해지고 똘똘 뭉쳐집니다.

우리 팀 중에 한 회원이 자기 순번이 세 번째 돌아왔을 때서야 겨우 제1 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30분인 게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지만 그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한마음으로 응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뭉쳐서, 작전을 세워 팀을 이끄는 사공격인 팀원의 말을 잘 따르면서 열심히 좋은 경기를 해서인지 우리 팀이 오늘 3전 3승으로 1등을 했습니다. 실력도 없고, 경력도 없고, 나이만 많은 나로서는 공짜로 1등을 거머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경기가 끝났을 때, 팀이 겨우 1승을 해서 참가상만을 탄 남편이 슬슬 옆으로 오더니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어, 잘했어. 잘할 줄 알았어."
"무슨 말야?"

"아까 회장님이 선물 주셨잖아. 그런 식으로 보답을 할 줄 알았단 말이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선수들의 점수를 전자계산기에 저장을 하면서 경기를 하느라고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내 자세가 그랬다는 것일 뿐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입니다. ⓒ 김관숙
1등은 양말 세트 2개, 참가회원인 남편은 1개를 받았습니다.
1등은 양말 세트 2개, 참가회원인 남편은 1개를 받았습니다. ⓒ 김관숙
정말 오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 팀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한 경기가 얼마나 재밌고 즐거웠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헤어질 때, 우리 팀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음에도 내가 먼저 팀원들에게 손을 내밀며 새해 인사말까지 했습니다. 돌아보니까 모두 승부를 잊고 즐거운 모습으로 인사들을 하고 있습니다.

칠팔십 대 어르신들이 더 머리를 깊이 숙이고 더 겸손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이 꾸준히 게이트볼 경기를 펼치게 하고 이끌어 가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하루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송년 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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