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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서울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는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다. 한국 사람 치고 경주로 한번쯤 수학여행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가고 또 가도 계속 매력 있는 곳이 바로 경주다.

그래도 한 번 다녀온 곳을 서너 번 또 가면 지겨워지기 쉬운 노릇. 경주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알차지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볼거리를 갖추고 있다. 불국사, 석불사, 대릉원 등 널리 알려진 문화재 대신 창림사지, 원원사지, 장항리 절터 등은 경주 관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은 관광지를 알차게 볼 수 있는 서남산 자락의 답사지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나정-양산재-창림사지-오릉-포석정이 주요 코스인 서남산 자락 답사는, 서로 모여있어서 도보로 쉽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라의 건국과 멸망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뜻깊은 곳이기도 한다.

나정

나정은 박혁거세가 탄생한 우물을 일컫는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는 이렇다. 6촌의 촌장들이 자기들을 다스릴 우두머리를 뽑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을 무렵 나정을 찬란한 비추고 빛을 보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겨 나정으로 가니, 샘 옆에는 흰 말 한 마리가 그 빛을 향해 절을 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백마가 남기고 떠난 그 빛은 붉은색 알이 비추고 있는 것이었고, 곧이어 알속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 경내
ⓒ 한대일
본래 비각과 돌로 덮여진 우물이 있었으나, 근래 발굴조사가 진행 돼서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로 이곳 나정이 신라 천 년 사직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나름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산재

나정 근처에 있는 사당 건물을 말한다. 양산재는 박혁거세를 모신 여섯 촌의 촌장을 모신 사당이다. 여섯 촌의 촌장은 양산촌의 알평공, 고허촌의 소벌도리공, 대수촌의 구례마공, 진지촌의 지백호공, 가리촌의 지타공, 고야촌의 호진공이다.

▲ 6촌의 촌장을 모신 양산재
ⓒ 한대일
지어진 지 그리 오래된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큰 볼거리는 없지만 때때로 관람객을 위해 개방을 하고 있다. 양산재 앞에 있는 널따란 공간은 나정과 그 주변 답사를 위한 주차장으로 쓸 수 있다. 대신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는 주차를 통제한다.

창림사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첫 궁궐을 지으니 그것이 지금의 창림사 자리라고 한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 자리하고 있는 창림사지에서는 궁궐임을 알려주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쌍귀부와 삼층석탑, 그리고 여러 주춧돌이 나뒹굴고 있다. 그것은 당시 궁궐이라고 하는 것이 조선시대처럼 웅장한 것이 아닌, 6촌장이 살고 있는 집보다 조금 나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신라 최초의 궁궐터였다고 하는 창림사지의 삼층석탑
ⓒ 한대일
양산재에서 창림사지로 가는 길 중간에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숲 속에 삼층석탑이 있기 때문에 길가에서는 삼층석탑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숲으로 우거진 곳이 여러 군데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창림사지를 지나쳐버리기 쉬우니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며 가야한다.

오릉

박혁거세가 죽어 묻힌 곳.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가 죽어 하늘에 올랐는데, 7일 뒤에 주검이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를 한 무덤에 장사지으려고 하자 갑자기 큰 뱀이 나타나서 이를 방해하였다고 한다. 결국 다섯 개의 능으로 나누어서 장사를 지내니 이것이 오릉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 안내문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오릉을 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그리고 혁거세의 부인이었던 알영부인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 박혁거세가 묻혀있는 오릉
ⓒ 한대일
오릉 경내에는 오릉과 함께 혁거세를 제사지내는 숭덕전, 그리고 알영부인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알영정이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경주 시내에서 서남산으로 올 때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오릉이므로 이곳을 답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좋다.

포석정지

신라 멸망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 현재는 포석정이라는 정자는 사라진 채 술 놀이를 즐겼던 돌홈만 남아있다.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의 고려의 싸움이 격렬해질 무렵, 신라의 경애왕은 견훤의 노골적인 반신라적 태도로 인해 고려와 손을 잡게 된다. 심지어 고려와 후백제간의 전투에 신라군을 구원병으로 보낼 정도가 되자 이에 격분한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로 침공했다.

설마 수도까지 직접 공격해오지는 않겠다는 마음에 포석정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던 경애왕에게는 청천벽력의 소식이었고, 곧 피난길에 올랐으나 얼마 안가 견훤에 의해 사로잡혀 자결을 강요받게 된다. 그 뒤 견훤은 왕족 김부를 경순왕으로 오르게 하니, 사실상 신라는 국가로써 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 신라 멸망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인 포석정지
ⓒ 한대일
포석정 경내는 돌홈 유적과 함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오릉과 마찬가지로 입장료를 받는다.(어른 500원) 시간이 좀 남았으면, 가까이 있는 배리석불입상과 삼릉을 둘러볼 것을 권한다.

이밖에도 서남산 자락에는 일성왕릉, 지마왕릉, 남간사지가 몰려있어 당일치기로 효율적인 답사를 즐길 수 있다. 불국사나 석불사 같은 커다랗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염증이 난 경주 관광객이라면, 그 자체로서의 볼거리는 대단하지 않으나 그 의미만큼은 어느 곳보다도 깊은 서남산 자락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입실론 (이란필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개인 블로그에 '입실론의 C.A & so on Travel 가이드페이퍼'를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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