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은아
ⓒ 이진선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최은아(20)씨가 좋아하는 말이다. 은아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가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를 만나 19일 하루 동안 함께 다녔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한빛맹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장애인특별전형으로 대학교에 들어갔다. 현재 단국대학교 영문과 3학년인 그는 겨울방학이지만, 계절 학기를 듣기 위해 주5일을 학교에 나가고 있다.

계절학기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세 과목을 듣는다. 수업이 끝나고 다른 강의실로 옮길 때는 친구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은아씨는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좋은 앞자리에 앉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수업 내용을 녹음해서 집에 가서 복습해야만 수업 시간에 시각적으로 놓치는 부분을 따라갈 수가 있다.

예습도 마찬가지다. 은아씨는 한 과목 수업을 듣기 위해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몇 배로 노력한다. 예습을 위해 밤을 지샌 적도 많다. 점심은 미리 준비해온 빵으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수업이 연이어 있어서 밥 먹을 시간이 없는 것도 이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이 불편하다. 옆에서 누군가 거들어 주지 않는 한 혼자 밥 먹는 것이 그에게는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빵을 먹거나 할머니가 싸주신 김밥을 먹는다.

눈이 되어 주는 브레일 노트

▲ 한글, 영문 등의 문서를 점자로 만들어 읽는 브레일 노트
ⓒ 김현수
수업에 임하는 은아씨의 자세는 적극적이다. 교수의 질문에 대답도 잘했다.

그런 은아씨가 수업 중간에 잠시 말을 잃었다. 수업 중간에 참고자료로 영화를 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누군가 옆에서 해설을 해주고, 대사를 들으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대사가 많은 영화가 좋단다. 대사를 듣고 화면을 상상한다. 영화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은아씨. 얼마 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영화를 무척 재밌게 보았는데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면 그도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은아씨는 항상 브레일 노트를 가지고 다닌다. 브레일 노트는 그의 눈 역할을 해준다. 브레일 노트는 한글, 영문 등의 문서들을 점자로 만들어 읽을 수 있게 만든 기구다. 이 브레일 노트가 교재를 대신한다. 마지막 수업인 영어시간 그는 '브레일 노트'를 이용해 영어를 읽고 해석한다. 은아씨는 영문학과 학생답게 막힘 없이 해석해 내려간다. 수업을 듣는 학생 중 그가 제일 예습을 잘 해와 교수의 칭찬이 이어진다.

이렇게 브레일 노트를 이용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지만, 불편한 점도 있다. 교재를 컴퓨터 파일로 받아야 브레일 노트로 옮길 수 있지만 저작권 문제가 걸리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책으로 된 교재 입력을 점자도서관에 부탁해 보지만 점자 도서관에도 인력이 한정되어 있어 늦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은아씨는 방학 때 다음 학기의 교재 문제로 늘 바쁘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 없어 고독하기도 하다"

학교에서 중간, 기말고사를 어떻게 보는지 물어봤다. 대필, 구술, 이메일 세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그 가운데 구술이나 이메일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단다. 교수들이 시험을 볼 때 은아씨를 많이 배려해 준다고 했다.

그에게 '배려'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는 장애인들을 돕는 도우미들이 있다. 이밖에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도 은아씨 옆에 앉아 도움을 준다.

"친구들의 그런 배려도 좋지만 가끔 무서운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어요. 친구들, 선배들과 친해지기 위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도 어렵게 참여했었죠. 하지만 저에게 배려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정한 친구로 다가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그는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부럽다. 대학에서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싶단다.

▲ 버스 정류장까지 은아의 할아버지가 데리러 나오셨다
ⓒ 김현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은아씨는 버스를 탄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친구들이 도와준다. 버스 번호는 옆에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그렇게 물어볼 용기가 없다면 밖에 다닐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버스안에서 집까지 가는 한 시간동안 그는 브레일 노트를 이용해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을 읽는다. 중간중간마다 은아씨 할아버지는 어디쯤 왔는지 확인 전화를 하신다. 버스 안내 방송이 안 나오거나 잘못 나오면 정류장을 지나칠 때가 많은 탓이다.

버스 정류장에 할아버지가 데리러 나오셨다. 은아씨의 손을 꼭 붙잡고 집으로 향한다. 은아씨는 현재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낙농업 일을 하신다.

6개월도 채 안되어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 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앞을 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보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안 보이는 암흑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색깔이란 것이 있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은아씨를 부모님은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셨다. 시골에 살았던 은아씨가 서울에 있는 한빛맹학교에 갈 수 있도록 이사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가 대학교 올라와서는 부모님이 시골로 내려가시고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셨다. 농사일과 은아씨 동생들을 부모님이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은아씨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을 동시에 보내신 이유는 서로 의지하면서 살라는 뜻같아요. 그리고 은아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남들보다 더 뛰어난 기억력과 청각을 하느님께서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꿈이 있어 행복하다

▲ 은아와 할머니
ⓒ 김현수
은아씨 방에는 점자로 된 책, 책상, 피아노가 있다. 그걸 보면 은아씨가 하고 싶은 것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문학 소녀'다. 읽고 싶은 책이 많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은 한정되어 있다. 점자로 되어 있는 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출판사에 연락을 해보지만 저작권 문제로 컴퓨터 파일을 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단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영국의 한 출판사에 연락을 해 사정을 얘기했더니 흔쾌히 파일을 보내줬다. 외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원문을 제공하는 것이 저작권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또 다른 장애물, 저작권

시각장애인들도 스크린 리더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컴퓨터를 할 수 있고 인터넷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티엑스티(txt) 파일 형태만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현행 저작권법은 시각 장애인에게 점자도서나 녹음도서만을 인정하고 티엑스티 파일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터넷도 알트텍스트를 달아놓은 홈페이지만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것을 달아놓은 홈페이지도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피아노 악보만 해도 그렇다.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꽤 피아노를 잘 친다.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칠 수 있는 곡은 한정되어 있었다. 점자로 된 악보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은아씨.

베토벤의 <비창>이라는 곡을 들려주었다. 피아노를 치는 그는 꼭 피아노의 건반을 모두 보고 있는 듯 했다.

그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 이남주 선생님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너를 가르친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라."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선생님이 되자고. 자신의 장애가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자. 은아씨는 오늘도 이렇게 외친다.

"꿈이 있는 나는 행복하다."

▲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은아
ⓒ 이진선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