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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잿간 가서 호미 가지고 와."
"잿간…이요?"


봄처럼 따뜻한 겨울, 할머니 따라 냉이 캐러 간다고 나선 광수에게 할머니가 호미 가져오라 시켰습니다. 광수는 호미는 가져올 생각도 못한 채 고개만 갸웃댑니다. 잿간이 무언지 알 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BRI@"아빠, 잿간이 어디야?"
"저기 있잖아."
"저건 화장실인데…."


용변을 보는 곳이 화장실인 줄만 알고 자란 아이들에게 '잿간'이란 말이 낯선 건 당연합니다. 돌아보면 광수나 준수가 고향집에 와서 잿간에 들어가 일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도시의 화장실에만 익숙한 녀석들이 잿간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녀석들이 철들 무렵 고향집도 조립식으로 새 단장을 해서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이 생겼으니 광수가 잿간이 무언지 모르는 게 무리가 아닙니다.

잿간을 가르쳐줘도 녀석은 문 앞에서 머뭇거리기만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데다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으니 선뜻 문 열고 들어갈 마음이 안 생기나 봅니다. 대신 들어가 벽에 걸린 호미를 내려 광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 이기원
잿간의 모습은 어릴 때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큼직한 돌 두 개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로 왕겨가 쌓여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겨울을 나던 시절엔 재가 쌓여 있었지요. 하지만 보일러를 돌려 난방을 하는 지금은 재 대신 왕겨가 쌓여 있습니다.

새벽마다 일어나 이곳저곳 말끔하게 비로 쓸던 아버지의 손길도 여전합니다. 잿간 구석 구석마다 비질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방으로 세운 기둥 사이로 수수깡을 엮어 올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벽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진흙이 떨어진 곳도 꽤 있습니다. 그 사이로 잿간 밖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시린 겨울 찬 바람도 송곳처럼 날아듭니다.

추운 겨울 잿간에 앉아 일을 보는 게 고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난방도 안 되는 터에, 통풍마저 자유로우니 여간 추운 게 아니지요. 새벽마다 일어나 이곳저곳을 쓸어낸 아버지가 다음에 하는 일이 화로에 담긴 재를 잿간에 쏟는 것입니다.

이글대는 화롯불도 밤새 방안에 있다 보면 대부분 재로 변합니다. 그래도 화로 밑바닥에는 밑불이 군데군데 남아 있습니다. 시린 새벽에 일어나 잿간을 찾는 식구들에게 그 밑불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존재입니다.

농사짓는 이들에게 잿간은 아주 유용한 곳입니다. 재에 섞인 인분이 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용변을 해결하는 곳을 떠나 농작물을 키워낼 거름을 만드는 곳입니다. 벽에는 각종 농기구가 걸려 있습니다. 방 안에 보관하기 어려운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 구실도 톡톡히 했던 것이지요.

새 단장한 집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어도 잿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늙고 쇠약한 몸을 이끌고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에겐 아직도 유용하고 쓸모가 많은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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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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